영화에서나 가능한 일

2015.05.10 20:39 입력 2015.05.11 11:02 수정
강유정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 “한 기업인의 죽음과 ‘리스트’
최고 권력층 부패 드러나고
정의와 진실이 찾아오는, 그런”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영화에서나 가능한 일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을 만날 때, 소설 같은 일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때 ‘소설’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거짓말처럼 놀라운 일을 의미한다. 가령, 이런 이야기 말이다. 갓 스무 살이 된 한 남자가 모함을 받아 11년간 수감생활을 한다. 절치부심 끝에 그는 탈옥하고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었던 사람들에게 복수한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줄거리이다.

억울한 일이 있거나 거대한 음모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복수를 꿈꾼다. 하지만, 복수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복수한다는 것은 손과 발이 모두 묶인 상태 즉 패배로부터의 탈피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일단 음모에 빨려들게 되면 복수의 힘을 잃게 된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짜릿한 모험서사로 각색되어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건, 우리의 삶 속에서 종종 목격할 수 있는 일상다반사가 아니라 현실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환상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복수는 매혹적인 서사이다. 복수를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과 힘이 필요하다. 권력과 재력, 즉 현실적 힘을 갖춰야만 복수심은 현실이 될 수 있다. 1845년 당시 대중적으로 가장 파급력이 큰 서사가 소설이었다면 현재 그 몫은 영상서사가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대중 서사는 대중들이 바라지만 현실에서 경험키 어려운 것들을 이야기로 보여준다. 복수 역시 그 중 하나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복수를 다루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 그 복수가 좀 더 사회적인 사건일 때도 있다.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결말이 주는 짜릿함도 여기서 비롯된다. 갑작스럽게 정부기관의 감청, 감시 대상이 되었던 변호사가 기가 막힌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부패한 국가 기관의 음모를 만천하에 알린다. 부패한 권력이 응징되고 선의의 피해자가 승리한 것이다.

마피아와 국가안보국 직원들이 서로에게 총을 쏴대던 모습은 영화의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그건 말하자면, 카타르시스이다. 정치 사회적 문제와 무관심했던 평범한 중산층 시민이 국가 권력의 엄청난 음모에 맞서 스스로를 지켜내고 그 음모의 더러움까지 밝혀냈으니 말이다. 이런 장면들은 범죄물이나 액션 서사에도 종종 등장한다. 궁지에 몰린 주인공을 압박하던 세력이 자기 꾀에 넘어가 온 천하에 그 잘못을 자백한다. <기술자들>이나 <나는 살인범이다>와 같은 영화에서 복수는 늘 성공으로 귀결된다.

부패한 국가기관의 음모를 고발한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한 장면. 이 같은 일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부패한 국가기관의 음모를 고발한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한 장면. 이 같은 일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기업이나 정부와 같은 좀 더 공고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경우도 많다. 환경 기업의 두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낸 <마이클 클레이튼>의 재판 장면이나 기자들의 양심이 정의를 지켜낸 <모비딕> 같은 경우가 그 예시이다. 영화 속에선 위기에 몰렸던 평범한 시민들이 마침내 정의를 지켜내고, 부패한 권력에 패배를 안긴다. 사필귀정이 실현되는 것이다.

영화 속 부패한 권력은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가운데서 전전긍긍하며 사라진다. 그의 부패가 언론에 밝혀지는 순간 영화 속 운명은 추락뿐이다. 비밀문서가 발각되고, 밀고자가 중요한 사실을 제보하며 부패의 게임은 그렇게 끝난다. 부패는 사라지고, 정의가 승리하며, 세상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말이다. 이런 경우도 있다. 중요한 정보를 남긴 채 누군가 자살한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그 정보를 은폐하려는 부패한 권력이 진실의 세력을 위협하지만 마침내 진실은 밝혀지고, 권력층은 패가망신한다. 그렇게 정의는 실현된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말이다.

자수성가한 굴지의 기업인이 리스트를 남기고 목숨을 버렸다. 리스트에는 최고위 권력층 실세의 이름과 거액의 돈이 쓰여 있었다. 영화처럼 고위 관계자들이 언론에 등장해, 일벌백계와 엄정한 수사를 다짐한다.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바로 그 장면, 부패한 음모가 발각되고 정의와 진실이 찾아오는 그 순간이 또 한 번 현실에서 발생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발각 이후의 수순은 급물살을 타고 진행된다. <용의자>나 <신세계>나 <부당거래>에서처럼, 진실은 툭 터져 나온다.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뇌관이라고 했지만 4·29 재·보선을 지나며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라면 이미 일벌백계가 끝났어야만 한다. 그런데, 가만 보니, 영화에서조차 깡패나 조직 폭력배처럼 학연이 부족한 권력들은 가장 먼저 처단되었다. 꼬리 자르기라는 용어로 설명되었던 장면과 닮아 있기도 하다.

어떤 식으로든 “배우”를 기용한다는 설정도 떠오른다. “배우”나 “깡패”에게는 전광석화처럼 적용되는 심판의 끈이 많은 권력층에겐 무디게 닿는다. 역시 현실과 영화는 다르다. 소설 속 암굴왕은 복수에 성공하지만 현실의 암굴왕은 탈옥조차 하지 못한다. 현실에 부재하는 정의가 영화에서나 실현된다면, 그건 그저 판타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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