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

2016.06.09 21:05 입력 2016.06.09 21:20 수정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만두

절대 믿지 않겠지만, 삼십 몇 년 전에 소개팅하던 내 친구들이 선택한 메뉴 중에는 물만두도 있었다. 흐늘흐늘한 날개를 가진, 뜨뜻미지근한 물에 담겨 나와서 젓가락으로 집노라면 미끄덩하고 도로 빠뜨리기 일쑤이던 물만두. 그걸 소개팅 메뉴로 먹었다는 건 이해가 안되지만, 사실이다. 분식집이 소개팅 장소로 이용되던 때였다. 변두리 분식집에서도 거의 갖추고 있던 메뉴인지라 누구나 물만두를 먹었다. 그때 분식집은 나름 격과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알루미늄 찜기에 천을 깔고 그 위에 아홉 개씩 올라 있던 통만두, 문자 그대로 철판에 지져서 구운 군만두에 고기만두와 찐빵도 있었다. 통만두와 찐만두는 원래는 다른 만두였는지 모르겠지만 분식집에서 시키면 같은 것이었다. 찜기째 서빙하면 통만두였다. 반죽을 발효시켜서 둥글게 빚는(중국식으로 말하면 파오츠(包子)) 만두는 고기만두라고 불렀다. 부푼 반죽을 떼어 재빨리 소를 넣고 끝을 예쁘게 오므리던 기술자들의 솜씨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만두

가게 앞에는 연탄을 때는 커다란 화덕 위에 큰 솥이 걸려 있었다. 솥뚜껑을 열면 엄청난 김이 골목에 가득 쏟아졌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 유리창 안에서 조리복이나 하얀색 티셔츠를 입은 만두기술자가 번개 같은 솜씨로 피를 밀고 만두를 쌌다. 그들의 엄지손가락에는 밀방망이의 자극으로 커다란 혹이 생겼다. 따지고 보면, 우리네 이런 분식집의 정경은 구한말 들어온 청인(淸人)들의 유물이다. 그들 중 하층 노동자들은 채소 재배, 벽돌 가공, 그 밖의 노동에 종사했고 중요한 직업 중의 하나가 바로 호떡집이라고도 부르던 만두가게 기술자였다. 만두는 그야말로 절제되고 참을성 강한 중국인들의 성정에 잘 맞았다고 한다. 하루종일, 몇 천개든 똑같은 만두를 빚어내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노동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중국인의 주식이던 만두(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부풀린 찐빵)는 나중에 일본식으로 팥소가 들어가서 ‘찐빵’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우리 입맛조차 일본인들이 크게 영향을 미치던 일제강점기의 유행이었다. 중국인이 시작해서, 일본식으로 적당히 바뀐(야키만두라는 일본식 이름조차) 중국 간편식이 분식집의 간판 아래 살아남았다. 분식집답게 다채로운 메뉴가 점차 추가되었다. 고추장 떡볶이며 쫄면, 꽈배기 같은 것들이었다.

대구 동성로에 가면 태산만두라는 진짜 만두집이 있다. 화상이 경영하는 이곳은 이런 만두의 풍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게 앞에서 김을 피워올리며 쪄내던 만두 솥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지만. 부산 범일동에도 백화점 뒤 소롯길에 이런 만두집이 있다. 서울 시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지역의 재래시장을 중심으로 몇몇 집들이 남아 있다. 시내의 그 자리를 아예 새로 들어온 신화교들이 대륙식의 만두를 빚으면서 밀고 들어왔다. 화교 도래 역사 130여년 만의 세대교체인가. 배추를 넉넉히 넣고 생강 향이 있던 옛 통만두의 맛이 아직도 혀에 남아 있다. 쉼 없이 밀방망이를 놀려 반죽을 펴던 옛 만두 노동자의 팔뚝이 문득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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