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하기 위해 목숨을 걸다

2016.07.31 20:56 입력 2016.07.31 20:57 수정
정희진 | 여성학 강사

얼마 전 방한한 <제이슨 본> 시리즈의 배우 맷 데이먼은 JTBC 손석희 앵커가 “<007> 시리즈(제임스 본드)와의 차별점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007은 여성 비하적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가 물 부족 해결을 위한 환경운동가이자 20대에 친구 벤 애플렉과 함께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사과하기 위해 목숨을 걸다

이 매력적인 배우에게 ‘겨우’ <007>과 <본 시리즈>를 비교해달라는 요청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사심을 담아 말한다면, 한마디로 ‘체급’이 다른 영화다. <007>은 영국 배우 대니얼 크레이그가 본드로 교체되기 전까지는 냉전 이데올로기 범벅에 약자를 ‘악의 축’으로 그린 미국산 순수 오락이었다.

<본 시리즈>와 <007>은 정반대의 정치학을 추구한다. <007>이 국가를 상징하는 스파이를 내세운 대리전으로 국민국가 개념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였다면, <본 시리즈>는 후기 국민국가 시대의 텍스트다. 베스트팔렌조약 이후 고안된 정상적인 국가는 국민-주권-영토가 있어야 하며, 국가는 국민과 국어를 만들어내고 국민은 국가에 등록되기 위해 노력했다. 서구에서 시작된 모델이지만 국가와 국민 간의 상호 정체성 확립 과정은 국가와 국가의 모임인 ‘국제(inter-national)’ 개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국가가 먼저, 국제가 나중”이 아니다. 국가나 국제나 가상의 개념이다.

<제이슨 본> 시리즈는 국가와 국민의 연결 고리를 문제시한다. 주인공은 그간 조국이 저질러왔던 일을 악몽으로나마 기억하고, 그 최전선에서 살아온 자신의 정체성(CIA 요원)을 부정하는 영화다. 한마디로, 그는 국민으로부터 탈퇴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는 국가의 이익을 증오하고 자신의 양심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를 응원하면서 국민-국가(nation-state)의 연결이 부정되는 장면을 지지하게 된다. 그 과정의 핵심에 사과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2편 <본 슈프리머시>의 도입부다. 주인공은 춥고 바람 부는 한겨울, 어두운 모스크바 밤거리를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구르고 쫓기며 어느 작은 집에 도착한다. 그의 얼굴은 피로와 추위로 반쯤 넋이 나가 있다. 눈은 충혈되고 숨소리는 겨우 이어진다. 소녀가 들어온다. 그가 도둑이나 성폭력범이라고 생각한 소녀는 잔뜩 겁먹은 채 “저희 집에는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녀를 안심시키며 본은 말한다.

“너희 부모님(러시아 하원의원 부부로 누명을 쓰고 죽음)은 애국자셨다. 나는 미국인이고 어쩔 수 없이 너의 부모님을 죽였고 너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너무 부족하지만 이 말을 하기 위해 왔다. 부모님을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기 바란다”는 요지의 사과를 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살해한 적국의 가족에게 사과할 목적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유럽 전역을 도망 다닌 것이다. 이 장면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사과. 사죄. 용서를 구하는 것. 타인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려는 자세. 이 영화에서 부모를 잃은 소녀는 주인공의 잘못을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깊은 죄의식에 젖은 채 소녀가 부모를 좋게 기억할 수 있도록 사과한다. 바로 옆 사람에게 하는 사과가 아니다. 그는 목숨을 걸었다.

한·일 관계에서 사과는 이 글의 분량을 넘어서는 주제고, 일단 우리 사회에서 사과의 의미는 타락 일로다. 나 같은 시민은 알아듣기도 힘든 부패 뉴스(예를 들면, 검사의 주식 대박)의 주인공이 여론에 몰리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억지 멘트가 사과다. 대개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데 어이가 없다. 국민들은 그들을 걱정한 적이 없다. 분노할 뿐이다. 사과해야 할 사람이 바뀐 경우는 더 억울하다. 피해자나 약자가 사과할 것을 강요받는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사과는 정의나 시비가 아니라 권력 관계의 문제가 되었다. 사과는 ‘을’이 ‘갑’의 자기 합리화와 마음의 평화를 위해 혹은 숨겨진 죄의식을 덜어주기 위한 제도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 우리는 자본과 각종 ‘갑’들이 통치하는 사회이면서, 동시에 일상적으로는 도덕적 기준이 매우 낮은 뻔뻔한 사람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과는 희귀한 일이 되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했다가는 상처받고 분노만 쌓일 뿐이다. “아예 기대하지 말라”가 위로가 되는 사회다.

우리는 흔히 ‘사이코패스’는 뭔가 특이하고 천재적인 나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사이코패스는 단순한 사람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에 걸맞지 않은 권력을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무능하고 불성실하지만 양심의 기준이 매우 낮은 사람이 사이코패스다. 즉 나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나쁜 일을 쉽게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 사이코패스다. 이런 사람이 주류인 사회에서 상식적인 사람은 우울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처럼 사과하기 위해 목숨을 걸 필요도, 그럴 만한 일도 없다. 자기가 저지른 일의 의미를 알고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방이 세상에 절망을 느끼지 않도록 고통과 복수심에 시달리지 않도록 헤아리는 마음을 보여주기만 해도 사과의 반은 이루어진 것이다. 이 글을 친구에게 보여주었더니, “진짜 문제는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사회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맞아, 그렇지…. 나는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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