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외 성애의 정치경제학

2016.07.10 20:51 입력 2016.07.10 20:53 수정
정희진 | 여성학 강사

며칠 전 학부모 대상의 강의를 갔는데, 의외의 질문을 받았다. 유명 영화감독과 여배우의 혼외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질문한 수강생을 실망시키기는 싫었지만, 관심 없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간통죄 존폐 논란 때부터 내 의견은 없거나 유보적이었다. 우선 ‘간통(姦通)’ ‘외도(外道)’ ‘바람’ 등은 뜻과 어감 모두 적절한 표현이 아니므로 이 글에서는 ‘혼외 성애(섹스, 관계, 사랑)’라고 하겠다. 통념과 달리 한국 남성의 혼외 섹스는 사랑보다 성 구매의 성격이 강하다. 일부일처제는 근대 중산층 핵가족의 규범일 뿐,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실현된 적은 없다. 남성이 자원을 독점한 사회에서 복지제도로서 일부다처제든 혼외 성애든 성산업이든, 남성 사회는 일부일처제를 보완하는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왔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혼외 성애의 정치경제학

혼외 성애는 찬반, 시비, 대책 마련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수천년의 역사를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성차별 위에 구축된 가족 제도에서, 혼외 관계의 원인과 결과는 성별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유부남의 혼외 성애는 두 여성의 사랑을 받지만, 유부녀는 두 남성에게 노동하는 경우가 많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과 사랑은 남성에게는 프라이버시지만 여성에게는 생존, 자아 개념, 시민권의 문제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은 있어도 젠더와 계급을 넘는 사랑은 없다. 이처럼 사랑의 자유와 사랑의 조건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혼외 성애를 “사랑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것은 낭만화된 무지다. 모성을 비롯해 그 어떤 사랑도 무조건적이지 않으며 영원하지 않다. 사랑만 한 정치경제학도 없다. 지난 50여년 동안 여성주의는 성과 사랑을 정치적, 공적 의제로 만들기 위해 투쟁해왔다.

성별을 바꾸어 생각해보자. “남성이 전업 주부로서 평생 아내에게 헌신한다. 덕분에 아내는 영화감독으로 성공했다. 치매에 걸린 장모도 간호했다. 아내는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아들뻘의 남자 배우와 ‘행복하고 싶다’며 떠난다. 이 사연은 실시간 검색어 1위로 등극한다. 온 국민이 이 전업 주부 남성의 고통과 모욕을 알게 된다.” 이런 경우가 있는가?

50대 유부남과 30대 미혼 여성의 사랑. 이 전형적인 낡은 뉴스에 대해 ‘사랑의 찬가’를 부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남자감독은 아내의 ‘작품’이고, 여자배우는 “다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얹은” 무임승차자다. 여기서 개인의 잘잘못은 없다. 문제는, 여성들은 항상 여성의 노동으로 자원과 매력을 갖게 된 남성에 의해 분할 통치된다는 사실이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는 바닥인데 성과 사랑에서만 평등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때 여성은 성별화된 자원(젊음과 외모)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성역할-이성애-결혼제도-성매매의 연속선 개념이 여기서 나왔다. 한국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는 말만큼이나 유언비어도 없다. 여성 노동의 증가를 지위 향상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남녀 임금 격차(gender wage gap)를 발표한 2000년부터 부동의 1위를 지켜왔다. 2014년도 역시 압도적 1위다.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36.7% 덜 받는다(2위 에스토니아는 26.6%). 지난해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29개 조사국 중 29위를 기록했다. 세계경제포럼의 성차별 지수 역시 145개국 중 115위다.

한국 여성의 교육 수준은 세계 1~2위인데, 노동시장 지위는 최하위권이다. 국가, 사회, 남성, 가족 제도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의 대책은 개인적 차원의 모색일 수밖에 없다. 고용 차별과 가사노동까지 이중노동을 하거나 가능성 있는 남자를 만나 ‘누구의 아내’로 살거나 비혼(非婚), 이렇게 세 가지다. “착한 여자는 천당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이 있지만, 실은 어떤 여자도 딱히 갈 곳이 없다. 아낌없이 투자(내조)할 만한 ‘잘난’ 남자를 만나기도 힘들지만, 강제든 자발이든 노동시장 진입을 포기한 고학력 여성은 사회 대신 가족 제도를 통해 자아실현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세상 그 어떤 보험으로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험이 있다(남편의 ‘새로운 사랑’). 결혼은 미친 짓이 아니라 도박이다.

이처럼 혼외 성애의 근본 원인은 성차별이다.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혼한 이들은 사랑이 식은 뒤에도 한 사람과 계속 살아야 하나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없다. 하지만 “불같은 사랑”이라고 해서 책임과 윤리가 면제되는 건 아니다. 사랑은 가장 치열한 권력 투쟁의 영역이지만, 당사자들은 탈정치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불성실한 삶이다.

나는 모든 사랑에 찬성한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사랑은 없다. 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매력은 철저히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그/그녀만의 매력 따위는 없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의 열애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상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쉽지 않은 것이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그 누가 쉽다고 했나.” 이 노래의 의미를 깨닫고 죽는 사람, 많지 않다.

아내의 헌신으로 출세한 유부남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이 문제를 보편적인 고통의 관점에서 생각해보기를 제안한다. ‘누가 가장 잘못했는가’보다 ‘누가 가장 고통 받는가’를 중심으로 생각하자. 더불어 그녀의 고통이 노동시장의 성차별, 가족 제도의 산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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