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 잘 부탁드립니다

2016.09.30 20:42 입력 2016.09.30 22:25 수정

[기자칼럼]김영란법, 잘 부탁드립니다

세무조사를 받는 기업 대표가 회사를 찾아온 국세청 직원들에게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했다. 청탁일까 아닐까?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청탁이 될 수 있다. 직무관련성이 큰 공무원에게 직무와 관련된 부탁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면 어떨까? 그래도 마찬가지다. 청탁이 될 수 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실질적인 의미가 그게 아니었다면 청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한없이 많다. 부모가 담임선생님을 만나 “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홍보실 직원이 기자에게 “보도자료를 보냈는데 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런 당부도 ‘직무관련자’에게 부정청탁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김영란법이 지난 28일 시행됐다. 대부분 사람들은 김영란법을 이른바 ‘3·5·10법’으로 안다. 식사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는 10만원 이하로 지출하면 문제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중헌 것’은 따로 있다. ‘직무관련성’이다. 직무관련성이 있을 경우 ‘3·5·10’은 적용되지 않는다. 단 한 푼도 쓸 수 없다. 나아가 말 한마디, 전화 한 통화 잘못하면 부정청탁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문제는 직무관련성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청탁’ 판단도 지극히 주관적이다. 나는 고유업무라고 생각해서, 혹은 의례적인 인사라고 생각해서 말을 건넸는데, 상대방이 ‘청탁으로 느꼈다’면 청탁이 될 수 있다. ‘잘 봐달라는 애교를 부리면 부정한 청탁자로서 가중처벌 대상이 될 수도 있다’(대한상공회의소의 김영란법 사례집)는 경고도 있다. 학생이 교수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넸으니 김영란법 위반이라던 1호 신고는 그래서 허투루 볼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직무관련성과 청탁에 대해 명쾌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주무부처인 국민권익위원회의 유권해석은 오락가락했다. 검찰과 법원도 잘 모른다. 이들도 “(김영란법에 저촉될 수 있으니) 당분간은 직무관련자인 변호사를 만나지 말자”며 몸을 사린다.

압권은 ‘직무와 관련이 있더라도 원활한 직무수행을 위해서라면 3만원 식사 접대가 허용된다’는 조항이다. 몇 번이나 다시 읽었지만 솔직히 무슨 말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직무관련이 있으면 식사가 안된다더니 ‘원활한 직무수행’을 위해서면 또 된다고 한다. ‘부정청탁이 있을 가능성이 크더라도 청탁을 더 잘하기 위해서라면 3만원 식사 접대가 허용된다’는 말과 같다. 지독한 형용모순이다.

그러니 다들 그 자리에서 멈췄다. 모 그룹은 석 달간 대외관계자를 접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공무원들은 민원인을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공공기관은 중앙부처가 하는 것을 보고 하자고 하고, 중앙부처는 청와대가 하는 것을 보자고 한다. 서로 눈치만 본다.

법은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예측가능성이 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지킬 수 있다. 법이 복잡하면 빠져나갈 틈새가 많아진다. 예외조항은 힘 있는 사람들부터 만든다. 김영란법도 ‘큰 고기만 빠져나가는 촘촘한 그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방법은 있다. 김영란법을 단순하게 다듬는 것이다. 하나는 직무연관성 규정을 없애는 방법이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3·5·10’ 안에서 지출했다면 따지지 말자는 얘기다. 3만원 식사에 의사결정을 바꿀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만약 ‘청탁 절대금지’라는 취지를 살린다면 ‘식사, 선물, 경조사’를 전면 금지하는 방법도 있다. 이유 여하, 관계 유무를 막론하고 전 국민 ‘각자 내기’로 가는 방법이다.

김영란법은 ‘좋은 취지’의 법이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좋은 법’이 아니다. 국민들이 믿고 준수할 수 있도록 입법보완이 필요하다. 그래야 좋은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있다. 김영란법, 이대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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