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의 약점

2017.01.15 20:51 입력 2017.01.15 20:53 수정

최근 개봉한 김태용 감독의 영화 <여교사>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의 ‘탁월한 선택’에 스스로 감격하고 있는데, 누군가 뒷좌석에서 “나라가 미쳐가니 영화도 미쳤구만, 막장….”이라며 투덜댔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금수저의 약점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집으로 오면서 영화를 복기해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 관객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이 영화는 “미쳐가는 나라”의 풍경이다. 영화가 현실보다 훨씬 덜 ‘미쳤을’ 뿐이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거칠게 요약하면, 영화는 정규직 교사와 기간제(계약직) 교사인 두 여성의 갈등을 그린다. “○수저” 표현이 진부하지만, 둘은 각각 금수저와 흙수저를 대표한다. 좋은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금수저의 무지와 운명’에 관심이 갔다.

계급 고착 사회에서 흙수저가 겪는 차별과 모욕은 말할 것도 없지만, 금수저라고 해서 모두 ‘잘되는 것’은 아니다. 내 주변의 금수저 혹은 준(準)금수저 자녀들을 보면, 다들 골칫덩이다. 별별 문제가 다 있다. 최소한의 공부나 노동은 일찌감치 굿바이고, 자동차 폭주, 성형, 술….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는 지루한 청춘들에게 소비는 최대의 놀이다. 부모와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난동은 비행기 안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부모들의 호소를 듣고 있노라면, 돈이 사람을 망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부모도 부자고 자식도 성숙하면 좋겠지만, 그런 집은 드물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금수저에 대한 경고다. 정유라씨처럼 근거 없는(?) 기이한 금수저가 아니라면, 즉 ‘정상적’인 금수저도 세상 물정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영화의 금수저처럼 “저는 고생을 안 해서 아무것도 몰라요”로 일관하다가는 큰코다친다.

흔히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말이 아니다. ‘끝’은 원래 끝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금수저라도 모든 욕구를 다 채우며 살 수는 없다. 문제는 선(線)을 모를 때 생긴다.

적정선을 인식하려면 자신과 인간관계, 사회를 알아야 한다. 모든 인간에게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흙수저는 선을 밟거나 넘으면 바로 태클이 들어오기 때문에 경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좌절”이다. 아니,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처지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금수저는 이 정치학에 무지하다. 분간이 없다. 주변에서 문제제기가 들어오면 돈, 협박, 거드름으로 대강 안면몰수고 공적인 소란이 생기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그만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놀라고 분노했던 부분은, 타인의 마음을 농락하는 금수저의 일상이다(물론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계속 놀라야만 한다!). 극중 ‘갑’은 타인에게 더러운 노동을 시킴으로써 ‘을’에게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빼앗는다. 결국 금수저는 처벌 받는다. 이 영화의 금수저는 모든 것을 가졌다. 언니까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언니(실은 하녀)가 자신이 짓밟은 흙수저라는 사실이다. 이 부분이 선을 넘은 것이다.

그 처벌이 해결은 아니지만, 어차피 인간사에 그리고 자본주의 구조에서 해결이란 없다. 최선의 정의다. 나는 화면 속으로 들어가 김하늘씨(흙수저 역)를 돕고 싶을 정도였다. 서두에서 언급한 관객의 말대로 나는 미쳤는가? 나는 이 동일시가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장난 삼아’ 남의 일자리를 뺏을 수는 있다. 그러나 타인의 진심을 이용하고 노리개 삼는 것은 인격 살해다. 이런 일을 당한 피해자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없다.

이 영화는 금수저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복수론’은, 잘못해놓고 처벌 받지 않으려는 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다. 사법 정의를 소유하고 있는 지배 세력은, 복수 외에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는 이들이게 “복수는 너의 것? 너의 끝!”이라고 속삭인다. 주변 사람들도 걱정한다. “복수하면 너만 망가진다.” “잊어라.” 저항, 정의, 복수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를 설명하지 못하면서, 복수는 무조건 나쁘다는 설교는 부정의하다.

영화 <여교사>의 주제는 인간으로서 마지노선을 자각한 흙수저의 승리, 상식적 권선징악이다. 불가능과 좌절을 처절히 깨달을 수밖에 없는 환경, 그것을 자원 삼아 인구의 절대 다수인 흙수저들은 선(善)으로 전진할 가능성이 있다. 금수저의 가장 큰 약점은 상대방에 대한 무시가 아니다. 무지다. 흙수저가 이 사실을 간파한다면, 무지한 그들을 이길 수 있다.

흙수저와 금수저의 갈등은 젊은이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금수저는 오히려 위태롭다. 그들은 부모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금수저는 부모의 자원이지 그들의 것이 아니다. 수저 논쟁은 상층 ‘부모’와 하층 ‘자녀’의 갈등으로 세대와 계급 모습이 복합되어 있다. 부모 세대에서는 결판이 났을지도 모르지만, 자녀 세대에서는 계급도 세습되지만 동시에 앎의 위치성도 승계된다. 흙수저의 유일한 자산은 한계선 자각에서 오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이고, 금수저의 운명은 무지다.

이것은 계급투쟁이 일방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황과 전선을 아는 것. 상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 자의 대결이라면 누구에게 승산이 있겠는가?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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