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인지 정책과 성인 잡지

2017.04.16 14:55 입력 2017.04.16 20:39 수정

60대 이상의 독자들은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1970년대, 모 국회의원이 재해를 당한 이재민(罹災民)을 ‘라재민’으로 읽어 망신당한 적이 있다. ‘에이피티 아파트’ 사건도 있다. 아파트먼트의 줄임말인 ‘apt’를 상호로 안 것이다.

[정희진의 낯선 사이]성 인지 정책과 성인 잡지

정치인은 이런 점에서 억울한 면이 있다. 소위 지식인으로 간주되는 이들 중에도 무식한 사람들이 많다. 특정 분야는 물론 자기 전공에서도 학식이 부족한 사람이 많지만 정치인만큼 욕을 먹지도 않고 매체에 보도되지도 않는다.

모든 앎의 문제가 그렇듯,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정신분석의 ‘자유연상(自由聯想·free association)’을 ‘자유연합’이라는 단체로 번역한 책이 있는가 하면, 푸코의 ‘훈육(주체적 종속)’ 개념을 그 반대의 의미인, 일방적 억압으로 소개한 책도 즐비하다. 포스트모던을 시간 순서로 이해한 이들은 부지기일 것이다.

이는 단순한 에피소드나 개탄거리가 아니다. ‘권력과 지식’의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논쟁거리다. 어떤 지식이냐, 누구의 무지냐에 따라 사회적 평가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무지는 창피하고 어떤 무지는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여성학이다. 여성의 지위가 낮기 때문에 여성학의 지위도 낮다.

여성주의 지식은 ‘사회악’이라며, 여성들에게 ‘제대로 된 여성학’을 가르치려는 남성을 흔히 본다. 상호 연관된 지식인데도, 가족사회학(여성)과 노동사회학(남성)은 성별화되어 있고 지위도 같지 않다. 심지어 여성학자 중에서도 여성학을 여성에 ‘대한’ 학문으로 오해하며 남성성 연구는 여성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나는 최근 과학의 성차별을 다룬 책에 해제를 썼는데, 과학자가 아닌 사람이 왜 썼냐는 항의를 받았다. 평화학이나 군사학 관련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가정폭력과 인권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가정폭력이면 ‘여성의 평화’ 문제인데, 여성학과 평화학을 별개로 생각한다. “왜 여성학자가 평화학을 하나”부터 변절론까지 반응도 다양하다. 여성학(gender studies)은 ‘융합’과 ‘통섭’의 대표적인 학문으로 가장 다학제적, 간학제적 관점이 필요한 분야다.

주로 공무원이나 남성을 대상으로 여성주의를 강의할 때, ‘성 인지’라는 용어는 언제나 크고 작은 사건을 낳는다. 사회 전반에 걸친 성별 제도의 작동과 그 영향을 고려하는 성 인지적 시각(性 認知的·gender perspective/sensitive)을 줄여서 ‘성 인지’라고 발음하면, 대부분 ‘성인지(成人誌)’, 즉 성인 잡지로 알아듣는다. 한자 병기 문제도 있지만, 여성 정책은 몰라도 된다는 사고가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자주 겪는 일이라, 나는 반드시 사전 설명을 하고 띄어읽기에 주의한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달 22일, 국민의당 대선후보 경선 토론회에서 김은경 세종리더십개발원장이 박주선 후보에게 ‘성 인지 예산’에 대해 질문했는데,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 후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여성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모 종합일간지가 이를 ‘성인 잡지’로 표기했다는 사실이다(다음날 정정 보도를 냈다).

‘성인 잡지’는 문재인 후보의 ‘삼디 프린터’ 논란과 다르다. 대개 ‘스리디’라고 하기 때문에 과학 기술 분야에 대한 그의 전문성은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삼디’와 ‘스리디’는, M16처럼 ‘엠식스틴’으로 읽든 ‘엠십육’으로 읽든 같은 말이다. 문제가 없다. 3D는 ‘3차원’으로 읽어도 되고 ‘스리 디멘션(three dimension)’으로 읽어도 된다. 그러나 성 인지와 성인 잡지는 완전히 다르다. 여성 유권자의 이해(利害)를 무시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문제는 ‘삼디’에 비해 ‘성인 잡지’는 큰 문제없이 넘어갔다는 점이다. 성차별이다. 성 인지적 관점은 모든 공동체(국가, 지자체, 조직 등)가 정책 기획과 집행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삶의 조건의 다름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방자치단체의 성 인지 예산 정책이 가장 대표적이고, 지방의회마다 전문가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도로 건설, 교육 과정, 복지 문제 등 모든 분야에서 성별은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는 것이다.

성 인지 정책은 ‘스리디’를 외치는 이들이 좋아하는 글로벌 용어다. 이미 22년 전인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부터 ‘성 주류화(性 主流化·gender mainstreaming)’와 함께, 국제사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다. 그러므로 성 인지적 관점이야말로 정치 지도자든 신문기자든, ‘오피니언 리더’의 자질 검증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사안이다.

성 차별의 근간은 성별 분업이다. 성별에 따라 노동시장에서 고용, 승진, 임금 문제는 물론 일상에서의 가사, 육아, 감정노동, 외모 관리, 생활방식, 인생의 관심사 자체가 달라진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차별과 분리다. 이는 성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문턱 없는 거리는 유모차를 이용하는 부부나 장애인, 노인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생리대 무상 지급, 수영장 이용권 날짜 확대 등은 가장 기본적인 정책 아닐까.

국민(유권자!)의 절반이 여성이다. 그런데도 여성이 겪는 어려움은 항상 사소하게 여겨진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어처구니없었던 경험이 생각났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성 주류화가 ‘성 주류화(性 酒類化)’냐고 질문한 남성 공무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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