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10번 출구' 그 후 1년

2017.05.14 19:45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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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무시할까봐 두려워하지만,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한다.” 작가 마가렛 애트우드의 이 말은 강남역 사건을 묘사한 기사 같다. 작년 5월 17일, 서울시 서초동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한 이른바 강남역 사건. 이후 내게 ‘오월’의 이미지는 두 겹이 되었다. 5·18과 강남역.

용의자의 범행 동기는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 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 특히 젊은 여성들의 의식은 크게 바뀌었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사건 현장 인근,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는 이름도 없이 젊은 날에 생을 마감한 피해여성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그 포스트잇 중에는 피해자의 어머니가 쓴 것으로 보이는 내용도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흐느꼈을 것이다. 며칠 후 비가 내렸고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자들은 포스트잇이 철거되기 직전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1004개의 추모 쪽지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나무연필, 2016).

이 사건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일상인 여성 살해(femicide)다. 매일 밤 가정폭력으로, 성산업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돼지 흥분제’ 합병증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목숨을 잃는지 통계가 없을 뿐이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부분 중 하나는 용의자 자신이 일관되고 분명한 태도로 범행 이유를 밝혔는데도, 경찰과 여론은 정신질환 경력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그는 여섯 명의 남성이 화장실을 사용한 후, 여성이 나타나자 살인을 저질렀다. 용의자는 자신에게 범행 이유를 “물어달라”는 확신범이었지만, 경찰과 사회는 “묻지마 살인”이라고 입을 막았다.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피의자 본인의 목소리를 부정하는 것은 인권 침해다. 용의자도 피의자도 수감자도 그 위치에서의 인권이 있다(고문당하거나 진술을 부정, 강요당하지 않아야 한다).

여성 살해를 정신질환 환자의 우발적 일탈로 믿고 싶은 심리. 인류의 반이 자신의 성별 때문에 평생을 공포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구조의 핵심이다. 남성 문화는 성폭력이나 여성 살해를 일부 ‘미친’ 남성의 발작으로 여김으로써 성차별 구조를 은폐한다. 효과는 대단하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그들의 존재로 인해 ‘나’는 가만히 앉아서 ‘괜찮은 남자’가 된다.

당연히 이는 진실이 아니다. 단어 사용부터 오류가 있다. 미친 사람, 아픈 사람, 나쁜 사람의 인간관은 각각 다르다. 성폭력 가해자나 여성 연쇄 살인범들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들의 이웃들이 “조용하고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어요”라고 증언하는 장면에도 익숙하다.

고정관념의 가장 큰 피해 집단은 건강 약자인 정신질환 환자들이다. 조현병(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에 대한 편견과 무지는 뿌리 깊다. 그들은 아픈 곳이 다를 뿐 보통 환자들과 다르지 않다. 몸이 불편할 뿐이다.

극명한 반증은 ‘여성’ 정신질환자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아무나 살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반 남성들도 여성 정신질환자로 인해 일상이 불편하거나 공포에 떨지 않는다. 오히려 “미친 여자”라는 낙인은 ‘창녀’와 함께 여성 환자는 물론 전체 여성을 통제하는 강력한 남성 권력이다. 이번 선거에서 유승민 후보의 자녀가 ‘잘 생긴 남성’이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대통령 후보의 아들에게 그런 식의 폭력을 가하는 여성 정신 질환자는 상상하기 힘들다. 게다가 유승민 후보는 ‘예쁜 딸로 인해’ “국민장인”으로 불렸지만, ‘훈남’ 아들을 둔 심상정 후보는 “국민 시어머니”라고 불리지 않았다. 문제는 간단하다. 성별 제도가 이 모든 상황의 열쇠다.

군 위안부, 전쟁시 대량 강간 등 인권 문제의 세계적인 전문가인 샬럿 번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폭력이 사소하게 취급되는 이유를 네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성차별은 사소한 일이어서 생존 문제 다음으로 미뤄도 된다는 인식, 둘

[정희진의 낯선 사이] '강남역 10번 출구' 그 후 1년

째, 여성 학대는 개인적 문제일 뿐 국가가 대처해야 할 정치적 사안이 아니라는 인식, 셋째, 여성의 권리가 인권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는 인식, 넷째, 여성 폭력은 너무 만연한 문제라서 불가피하며 어차피 노력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고방식 등이다. 여성을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하는 발상부터 패배주의까지 다양하다.

남성 문화는 여성에 대한 폭력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있는데 없는 문제인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해는 인간의 생명을 해치는 가장 성차별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성별이 무시된다. 그러니 해결될 리 없다. 아니, 해결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것이다.

나는 성매매가 필요악인지 아닌지 따위에 관심이 없다. 질문은 한 가지. 왜 언제나 파는 혹은 팔리는 사람은 여성이고 사는 사람은 남성인가이다. 성폭력도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여성인 경우는 거의 없다. 가정폭력은 더욱 그렇다. 만취한 가해 남편은 아무리 필름이 끊겨도 아무나 때리지 않는다. 꼭 집에 와서 아내만 구타한다.

25년 전, 1992년 10월 26일. 기지촌 성산업에 종사하던 여성 윤금이씨(당시 26세)가 미군 병사 케네스 마클(당시 19세)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처음도 끝도 아니었다.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자마자 시작되었으며 ‘윤금이 이후’ 격렬했던 여성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희생은 멈추지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여성에겐 모든 곳이 ‘강남역’이다. 나의 바람은 여성 폭력 근절이라기 ‘보다’ 피해가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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