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영국 여왕의 어린시절 영상 하나가 공개되면서 시끄러웠다. 엘리자베스 2세가 어머니, 삼촌, 여동생과 함께 나치식 경례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었다. 당시 엘리자베스의 나이는 일곱살이었다고 한다. 왕실 측은 당시 어린 여왕이 TV에 나오는 동작을 따라하며 놀고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확실히 특정 몸짓을 근거로 해서 일곱살 어린아이에게 나치즘을 추궁하는 것은 과해 보인다.

[고병권의 묵묵]쓸모없는 사람

아마 이 영상을 문제 삼은 이들도 어린 엘리자베스의 사상을 검증하려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의심한 것은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영국 왕실 자체였다. 몇몇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독일계 혈통의 영국 왕가는 독일에 많은 친·인척을 두었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히틀러를 지지했다고 한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앞서의 영상에도 등장하는 엘리자베스의 삼촌인 에드워드 8세였다. 비록 한 해를 채우지 못하고 왕위를 내려놓았지만 그는 어떻든 영국의 왕이었다. 그런데 해당 영상을 찍을 때인 1933년은 물론이고 전쟁이 발발한 1939년에도 그는 나치를 지지했다. 지금으로서는 그가 개인적 일탈을 한 것인지, 영국 왕실 자체의 어떤 성향을 보여준 것인지 알 수 없다.

두 나라 지도자들의 미묘한 연관에 대해 들었을 때, 내게는 영국 공리주의와 독일 나치즘 사이에도 어떤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본격 연구를 해본 적이 없는 터라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의심이 최근 더욱 강해지고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 두 이념은 아주 다르다. 영국의 공리주의는 낭만적 영웅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판단을, 예외보다는 규칙을 중시한다. 행복조차 현실적 효용을 통해 접근했던 매우 실용적이고 계산적인 이념이다. 이런 공리주의를 히틀러를 영웅시하고 아리안종의 우수성을 설파하며, 수백만의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낸 광기적 행동과 연결짓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제를 하나씩 파고들어 가면 헷갈리는 지점들이 자꾸 나타난다. 나치의 선동적 연설만 아니라 공리주의자들의 합리적 계획 속에서도 다수의 행복을 위한 소수의 제거, 인간 개량을 위한 유용성 평가 등을 발견하거나 추론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제러미 벤담이 구상한 수용소도 그런 예 중 하나다. 이 수용소는 쓸모와 비용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는 사람이 인간을 그런 눈으로 볼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보여준다. 사회적 부만 축내는 쓸모없는 인간들, 생계 하나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쓰레기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벤담은 이들에 대한 교육이나 도덕적 호소는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내놓은 해법은 강제수용소를 통한 인간 개조였다.

1920년대 독일 헌법학자 칼 빈딩은 이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고민을 이어받았다. 처음에 그가 제기한 것은 안락사 문제였다. 더 이상의 치료가 의미 없고 온전한 의식도 없는 사람들. 자기 삶의 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들에게 연명 치료를 해야 하는가. 삶의 가치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삶의 주권성에 있다고 본 그는 ‘살 가치가 없는 삶’이라는 개념을 제기했다. 그저 생존만 유지하는 그런 삶을 돌보기 위해 우리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는 전쟁터의 병사들이나 탄광 등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과 시설에 수용된 정신장애인들을 대비시켰다. 그리고는 후자가 그 삶의 가치에 비해 너무 많은 돌봄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안락사 문제를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처분과 맞물리게 한 것이다.

히틀러는 빈딩의 이러한 사고를 받아들였다. 그는 삶의 존엄을 잃어버린 채 생존만을 이어가는 사람을 안락사시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살 가치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삶의 효용이 없는 사람들에게 점차 확대 적용했다. 그렇게 해서 독일 각지의 정신병원에서 온 정신질환자들 6만명이 간단한 검사를 거친 후 가스실로 들어갔다. 아우슈비츠의 유태인들은 그다음에 불려온 사람들이었다.

지난주 나는 경기도의 한 정신장애인 요양시설을 둘러보고 왔다. 나무들이 높이 자란 숲속에 들어앉은 산뜻한 건물. 직원들도 친절했고 장애인들도 모두 선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금세 드러났다. 간식이 들어오자 수십 명이 조용히 줄지어 다가왔는데 놀랍게도 명부에 적힌 순서와 단 한 명도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인터뷰한 장애인은 “이곳은 정말 자유롭다”면서도 마당에 있는 벤치에는 혼자서 한 번도 앉아본 적이 없었다. “막는 사람은 없지만 나갈 수는 없다”는 알쏭달쏭한 말만을 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나처럼 쓸모없는 사람을 거둬준 것도 감사한데 어떻게 감히.”

시설장은 ‘여기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아느냐’고 죽는소리를 하고,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은, 약 때문인지 훈련 때문인지, 스스로를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라고 여겨 숨죽이고 있는 곳. 물론 우리가 아직 가스실에 이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저 수만명을 시설에 격리해 둔 채 안전, 효용, 비용을 계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설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이런 시설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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