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이라는 이름의 수익모델

우리는 한·미동맹을 앓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한·미동맹은 병적인 것이다. 나라들끼리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행동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기본적인 생존 전략이다. 이 점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일어난 몇 가지 에피소드들은 한국이 미국의 정상적인 동맹국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미국에 무례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미국에 대한 예를 다하느라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동의 목적과 행동이란 저마다의 목적과 행동이 전제된 것인데, 우리는 동맹을 위해 그 전제를 너무 자주 포기한다.

[고병권의 묵묵]동맹이라는 이름의 수익모델

살기 위해 택한 동맹인데 거기에 생존의 멱살이 잡혀 있는 꼴이다. 저쪽은 이익을 고려하는데 이쪽은 생존을 고려한다면 공정하고 호혜적인 동맹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내놓을 테니 말이다. 생존과 주머닛돈의 교환. 작은 주머닛돈을 주고 귀한 생명을 지켰으니 남는 장사를 한 것인가. 실상은 생존 위협에 굴복해서 돈을 뜯긴 것임에도, 국제질서에서는, 특히 한·미동맹에서는 그것을 수지맞는 거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조폭의 구역관리를 받는 노점상들은 보호와 상납금의 교환이 실상은 교환이 아니라 예속임을 안다.

생존을 포기하고 무모한 행동을 하자는 말이 아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거래든, 관계를 맺을 때는 생존에서 한 걸음 떨어져 볼 수 있어야 한다. 설령 거기에 생존이 걸려 있을지라도 그렇다. 그래야 그 관계가 더 나은 삶을 보장한다. 상대방에 내 생존이 걸려 있다는 신호를 주면 그는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생존을 떠올리며 학대를 견뎌낼 수는 있겠으나(홉스식 신민도, 헤겔식 노예도 이렇게 탄생했다), 이것은 서로 어깨를 다독이며 포옹할 때조차 우정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안보에 대한 미국의 보증에 한국이 목을 건다는 신호를 보냈다면, 앞으로 치를 동맹의 대가는 정말 클 것이다. 국민의 생존에 비춰보면, 천문학적 가격의 무기도 싸 보이고, 세계 최고 수준의 방위비 분담액도 부족해 보이고, 자동차 한두 대 덜 파는 것도, 국내 산업 보호조치를 해제하는 것도 그리 중요해보이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러다가는 북한이 미사일을 한 번 쏘아 올릴 때마다 남한은 미국의 물건을 하나 더 사주는 구조가 고착될지도 모르겠다.

요즘 한국의 정치권과 언론 분위기라면 트럼프 정부가 굳건한 한·미동맹을 굳건한 수익모델로 만드는 데 별 어려움도 없을 듯하다. 한·미동맹에 관해서는 재검토라는 말 자체가 금기어이다. 우리의 이익을 따져볼 용기를 못내는 것을 넘어 이성적 판단 기능 자체가 멈춘 것 같다. 마치 시설에 오래 수용된 사람들이 온갖 학대에도 불구하고 시설에서 쫓겨날까봐 시설장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과 같다.

특히 최근 주류 언론의 태도는 정말 안쓰럽다. 지난 대선 때는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을 그렇게도 떠들어댔다. 북핵 문제에 대해서 한국이 미국과 딴소리를 내면 미국이 한국을 빼고 갈 것이라고 했다. 전형적인 약자의 해석학이고 노예의 해석학이다. 자기 생각보다 주인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짐작해서 자기 행동을 정하는 것이다. 딴소리를 내면 우리를 데려가지 않을 거라는 말, 그 시비를 떠나 그런 생각으로 살아온 삶에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에는 대통령 특보가 학술행사에서 “사드 때문에 깨지면 그게 동맹이냐”는 말을 했다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리고는 트럼프 대통령이 사드 배치 지연과 관련해서 격노했다는 뉴스도 나왔다. 일부 언론에서는 ‘격노했다’는 말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욕설까지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욕설’은 물론이고 ‘격노’도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가공된 것이었다. 한국 언론이 미국 대통령의 심기를 헤아리지 못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 미국 대통령보다 더 격노해서 쓴 기사였다. 백악관 참모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문재인 대통령을 ‘믿지 말라’고 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 출처는 한국에 앉아서도 저 멀리 백악관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내다보는 ‘워싱턴 정가에 밝은 한국의 소식통’이었다. 그런데 이 역시 백악관 참모들이 아니라 한국 언론이 미국 대통령에게 고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지난 한 달간 이런 기사들이 넘쳐났다. 도대체 한·미동맹을 어느 나라의 시각에서 보고, 어느 나라의 목소리로 말하는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다 ‘미국에 대한 은혜를 모르는 나라가 되지 말자’는 다짐까지 듣고 나면, 그리고 그것이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진심임을 확인하는 에피소드들을 듣고 나면 정말 앞이 캄캄해진다. 한쪽은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다른 한쪽은 예쁨을 받으려 한다면 둘의 관계가 어찌될지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런 식이면 한국은 미국의 무릎 위에 앉을 수는 있어도 결코 테이블 맞은편에 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 루쉰이 홍콩의 청년들에게 했던 말 중에 나를 참 아프게 한 구절이 있었다. 그는 온갖 수모를 겪고도 할 말을 못하는 중국의 현실을 언급하며, 청년들에게 중국을 ‘소리 있는 중국’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소리를 잃어버린 민족의 비참을 환기시키며 말했다.

“여러분, 조선의 소리를 들어보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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