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광장 생활

2018.03.14 21:15 입력 2018.03.14 21:16 수정

[기자칼럼]슬기로운 광장 생활

일본 드라마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의 주인공 마이는 매일같이 무언가를 버리지 못해 손이 근질거리는 ‘버리기 마녀’다. 학창 시절 졸업앨범부터 남편과 연애할 때 주고받은 커플링까지 필요 없는 것은 일단 버리고 본다. 일본에서 정리 노하우를 소개한 블로그로 인기를 끈 일러스트레이터 유루리 마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린 동명의 만화가 원작이다.

그렇다고 극단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마이는 최소한의 물품만 갖춘 집에서 살고 있다. 결론은 필요 없는 물건들을 치우고 나니 집도 넓어지고, 청소하기도 편해 오히려 머물고 싶은 집이 됐다는 해피엔딩이다.

무엇을 채울지보다 어떻게 비울지는 비단 사적 공간인 집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공적 공간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대표적인 공적 공간으로는 광장을 꼽을 수 있다. 광장 역시 깨끗이 비워질수록 매력적이다. 비어 있지만 사람들의 일상으로 다시 채워지는 공간, 그곳이 사람들이 내 집처럼 머물고 싶은 광장이다. 서울 도심에도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이 있다. 안타깝지만 두 곳 다 머물고 싶은 광장과는 거리가 있다. 서울광장은 사방이 도로로 둘러싸여 접근성이 떨어지고, 광화문광장은 차량소음으로 시끄럽다. 무엇보다 꽃밭, 전시관, 동상 같은 화려한 시설물만 있을 뿐 한여름 뙤약볕을 피하기도 어렵고, 편히 앉을 수 있는 공간도 마땅하지 않다.

버리기 마녀에게 광장 정리를 맡겨보자. 아마도 광장에 있는 시설물을 다 없애자고 하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서울광장의 잔디를 가장 먼저 치우자고 할 것이다. 애초 광장에 잔디를 심은 것은 아이러니다. 그나마 잔디보호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때도 많다. 광화문 도로 한가운데에 중앙분리대로 만들어 놓은 광화문광장 또한 그렇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로 세종대왕 동상이 광화문을 가로막고 있어 시야를 가린다.

언젠가 유럽을 여행하다 가본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노천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계단에 앉아 책을 읽거나 잡담을 나누었다. 때론 떠들썩한 축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유럽 광장이 좋아 보이니 무조건 베끼자고 조르는 건 아니다. 광장이 일상의 연속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두 광장은 태생적인 한계가 있긴 하다. 이명박 시장과 오세훈 시장 시절 광장을 조성하면서 사실상 폐쇄형 광장으로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자. 그래도 광장이 여전히 전시행정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텐가. 일년의 대부분 전국 특산물을 파는 시장이나 이벤트성 홍보 행사가 열린다. 정작 시민이 광장을 이용하려면 서울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서울, 도시의 품격>의 저자 전상현은 ‘공간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 인식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시민들은 공공 공간을 통제하는 권력의 부당한 태도에 그다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아요. … 민주 시민사회의 공공 공간은 분명 시민이 요구하고 전용할 수 있는 공간인데도 말이죠.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여전히 공공 공간을 정부가 계획·통제·관리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 건축학자 프랑코만 쿠조는 <광장>에서 “광장 없는 도시는 죽은 도시”라고 했다. 다행히 지난해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계획을 밝혔던 서울시가 ‘녹색교통진흥지역’으로 지정된 한양도성 내부 주요 도로를 올해 4∼6차로로 줄이고 보행 공간으로 바꾼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광화문광장은 그동안의 고립된 ‘교통섬’에서 벗어나 찻길 없는 ‘진짜’ 광장이 된다. 자동차 방해를 받지 않고 잠시 쉴 수 있는, 허가받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는 그런 광장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그러다 촛불을 들어야 한다면 광장에 모여 다시 촛불을 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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