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의 적정 수준

2018.04.01 21:26 입력 2018.04.01 21:27 수정

“제3세계 대다수 농부들에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트럭 따위는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당나귀보다 조금 나은 차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런 차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좁은 비포장도로에 현대식 트럭 하나라도 등장하면 짐 싣고 가던 당나귀와 사람들은 모두 비켜서야 한다.”

[산책자]만족의 적정 수준

편집 중인 원고를 보다가 만난 대목이다. 자사 책을 홍보하는 격이 될까봐 제목은 밝히지 못하겠다. 우연일까. 이런 구절을 읽고 있는데 TV에서 당나귀에 사탕수수를 싣고 장에 가는 에티오피아 농부들 이야기가 나온다. <가축>이라는 다큐멘터리다. 열댓 명의 농부들이 당나귀에 100㎏씩 사탕수수를 싣고 4시간을 걸어 장에 간다. 당나귀 대상(隊商)이다. 가파른 산등성이 비포장도로에 대형트럭 하나가 먼지를 피우며 나타나자 그것을 피하며 한 농부 여인이 말한다. “지난해에는 장에 가던 사람들이 트럭에 치여 17명이 한꺼번에 죽었어요….”

가슴이 아프다. 책에서나 보던 이야기가 오늘도 세계 어디선가 벌어지는 일임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복잡하다. 가축은 이 가난한 농부들에게 적당한 이동능력뿐 아니라 젖과 고기를 제공하고, 땔감이나 비료로 쓸 수 있는 분뇨까지 남긴다. 이들이 영위하는 삶의 수준에서는 트럭보다 튼튼한 가축 한 마리가 훨씬 쓸모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삶에 최신 기술이 끼어들면 그것은 편리를 내세워 도로와 같은 공공재를 독점하고, 재래 기술에 의존해서 살던 사람들을 도태시킨다.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로 충분했던 길이 현대식 트럭과 같은 최신 기술을 위해 막대한 세금을 들여 포장이 된다. 그와 함께 당나귀는 위험한 낭떠러지 길가로 더욱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꼭 조롱을 한다. 과거에 비해 얼마나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는데 조선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이냐, 산업혁명기에 기계를 파괴했던 러다이트들과 무엇이 다르냐.

기술적 편의는 어느 정도의 독점적 공급 체계가 이뤄지고 나면 반드시 이용자보다는 공급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카카오택시 유료화를 보자. 처음에는 무료로 ‘연결’을 제공하다가 모두가 그것을 사용할 정도로 서비스 독점이 이뤄지고 나면 슬그머니 유료화된다. 원래부터 그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택시 잡기가 어려워진다. 독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 독점적 서비스에 너도나도 편승하다 보면 얼마 안 가서 유료 이용자들조차 택시 잡기가 예전과 똑같이 어려워진다. 감히 예측해본다.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대한의협 협회장에 반사회적 극우인사가 당선되어 시끄러웠던 한 주다. 의사들은 문재인케어와 현행 건강보험 체계에 대한 의료인들의 반발이 이런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고 변명한다. 건강보험의 비급여 항목을 급여 항목으로 대거 바꾸면서도 보험수가는 여전히 꽁꽁 묶어둠으로써 의사는 더 이상 양질의 진료를 제공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이 때문에 환자들의 선택권도 제한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보험료와 수가 인상 없이 급여 항목을 대폭 늘리는 방식으로 보장성만 강화하였으니, 그나마 수익을 올렸던 비급여 항목에서 적자부분을 더 이상 메울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약과 새로운 처치 기술은 날마다 나오는데 현행 체계에서는 그것을 쓸 수 없어서 의사와 환자 모두가 손해를 입는다는 주장도 있다.

이 문제에 얽힌 이해관계는 너무 복잡하여 나 같은 사람은 단번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나은 진료’나 ‘의료 선택권’이라는 이름 아래 환자들의 욕망과 의사들의 기득권을 조장하는 방식으로는 문제가 절대 풀리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의료라는 공공재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으려면 최고의 의료기술보다는 적정 수준의 값싼 치료 기회를 더 많은 사람에게 배분하는 방식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면 일 년에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하는 첨단 의료장비보다는 매일 이용할 수 있는 단순한 장비를 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명의 목숨에 모든 의료 자원이 투여되기보다는 백 명의 고통을 다소나마 줄이는 쪽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죽게 될 사람이 절대로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들이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들 인간에게 행복이란, 그리고 고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의 실존적 가치관에까지 들어가야만 해결될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최고보다 적정이 나을 때가 많다. 인간은 생각보다 가능성이 큰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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