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주부들’과 그 자매들

2018.05.17 20:52 입력 2018.05.17 20:54 수정

여성을 주 제물로 삼던 스릴러 장르에 최근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 눈길을 끈다. 역대 JTBC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김희선, 김선아 주연의 <품위 있는 그녀>를 비롯해, 올해 김남주에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안겨준 JTBC 드라마 <미스티>, 한가인의 6년 만의 드라마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OCN <미스트리스>, 송윤아와 김소연의 ‘워맨스’를 내세운 SBS <시크릿 마더> 등 여성 중심 스릴러가 연이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은 특히 기혼 여성들의 억압과 불안을 극의 중심 재료로 삼는다. 하나같이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서사인 미국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을 연상시킨다는 평을 듣는다는 점에서도 그 공통된 정서를 알 수 있다. 미국 중산층 주부들의 비밀스러운 일상을 그린 <위기의 주부들>은 기혼 여성의 솔직한 욕망을 통해 가족제도의 모순을 신랄하게 파헤쳐 방영 당시 미국가족협회로부터 ‘주부들의 일탈’을 부추기는 문제작으로 비난받기도 한 작품이다.

OCN 드라마 <미스트리스>의 한 장면.

OCN 드라마 <미스트리스>의 한 장면.

최근 국내에서 유행하는 ‘한국판 <위기의 주부들>’은 여성의 불안한 내면과 가족제도의 균열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먼저 지난해 방영된 <품위 있는 그녀>는 준재벌가의 ‘우아한 사모님’으로 살아가던 우아진(김희선)이, 그녀와 같은 삶을 욕망하는 여성 박복자(김선아)와 만나면서 혼란을 겪는 이야기다. ‘완벽한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우아진은 신분상승을 위해 모든 것을 거짓으로 꾸몄던 박복자와의 만남을 통해 결국 자신의 삶 또한 허상임을 깨닫고 가족제도 바깥으로 탈주한다.

그런가 하면 올해 초 방영된 <미스티>는 대한민국 최고의 앵커 고혜란(김남주)이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미스터리 스릴러 안에 기혼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향한 욕망과 주부로서의 억압이 충돌하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혜란을 둘러싼 가장 큰 위협은 커리어 경쟁자나 살인 혐의보다 그녀의 사생활에 대한 끝없는 의심에서 비롯된다. 혜란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언론인으로서 능력 외에도 주부로서의 완벽한 모습을 요구받고 이 불가능한 양립은 비극적 결말로 돌아온다.

지난주 방영을 시작한 <시크릿 마더>는 자녀 교육에 모든 것을 바치는 강남 엄마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네 명의 중심인물은 모두 어두운 비밀을 감추고 있다. 딸을 잃어버린 아픔을 숨기고 있는 윤진(송윤아), 외도한 남편과 쇼윈도 부부로 살아가며 자신도 불륜을 저지르는 혜경(서영희), 자식을 영재고등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이혼을 감행하는 화숙(김재화), 우아한 가면 뒤에 전직 호스티스라는 과거를 감춘 지애(오연아)가 그들이다.

이들의 비밀은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는 기혼 여성들의 분열된 내면을 상징한다. 특히 정신과의사에서 아들 교육을 위해 전업주부로 변신한 주인공 김윤진은 ‘슈퍼맘’이기를 요구받는 기혼 여성의 스트레스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의 불안은 아들의 뒤처진 성적뿐 아니라 딸을 지키지 못한 ‘실패한 엄마’라는 죄책감에서 비롯된다. 살인사건의 진범이 누구인가 하는 미스터리보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윤진의 위태로운 내면이 <시크릿 마더>의 가장 큰 스릴을 담당한다.

OCN 드라마 <미스트리스>도 마찬가지다. 네 명의 주인공 가운데 기혼 여성인 세연(한가인)과 정원(최희서)의 이야기가 가장 공포스럽게 묘사된다. 2년 전 남편의 실종으로 어린 딸을 홀로 키우는 세연의 이야기에는 한부모 가정 워킹맘의 불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딸을 맡기기 위해 고용한 보모가 등장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거의 아동 실종 스릴러인 <미씽: 사라진 여자>의 공포를 연상시킨다. 또 다른 기혼 여성 정원(최희서)의 불안 역시 소위 ‘정상가족’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완벽한 가정을 꿈꾸는 남편은 아이에 집착하고, 계속해서 임신에 실패하는 정원의 스트레스는 감정조절장애로까지 나타난다.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위기의 주부들’과 그 자매들

최근 이 같은 여성 중심 스릴러의 부상은 기혼 여성들의 부담이 갈수록 가중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초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정부 차원에서 가족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 지원 등을 통해 이상적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했고, 이로 인해 기혼 여성들에 대한 억압은 더욱 심화됐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 이후 핵심 정책 과제로 삼았던 일·가정 양립정책 또한 기혼 여성들의 과로와 부담을 가중시킨 주요인이었다. 이 시기 맘충, 앵그리맘, 맘고리즘 등 기혼 여성 관련 신조어들이 계속해서 증가한 것도 이러한 억압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에도 기혼 여성들의 일탈을 다룬 드라마들이 대거 등장한 시기가 있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위상이 흔들리면서 ‘아내들의 반격과 복수’를 다룬 소위 막장드라마들이 유행한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 드라마 속 여성들이 결말에 이르러 새로운 결혼과 임신을 통해 기존 가족제도로 다시 편입되는 것과 달리, 가족제도의 균열을 좀 더 진지하게 다루는 요즘의 여성 스릴러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시효가 이제 만료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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