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2004’ 커밍순

2018.09.14 20:48 입력 2018.09.14 20:54 수정

“ ‘응답하라’ 시리즈 다음 편은 <응답하라 2004>입니다. 이유를 아세요?”

토끼 눈을 한 대학생들이 나를 쳐다본다. 각자 이유를 찾도록 잠시 내버려둔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2004년은 바로 내가 대학의 전임교수가 된 ‘매우 중요한’(?) 해라고 답한다. 허탈한 썰렁 개그다.

비웃음을 충전한 쓴 미소를 던지는 학생들에게 신속하게 진짜 이유를 알려줘야 한다. 2004년은 대학가에서 쓰이던 ‘스펙’이란 단어가 신조어 사전에 공식 등재된 해라고.

[사유와 성찰]‘응답하라 2004’ 커밍순

2004년은 대한민국 모든 대학들이 미래 청년의 무한한 꿈을 스펙이라는 보자기로 덮어씌우는 일을 눈감아준 원년이다. 교수로 임용되었다고 기뻐했던 그해는 아무도 모르게 대학교육을 망가뜨리는 거사에 내 손과 발을 직접 담그는 원죄의 해였다.

나는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 아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죄의 해가 몇 년 지난 후, 나는 소위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들의 70%가량이 심각하게 자살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설문조사를 만났다. 충격이었다.

더 이상 부모의 공부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명문대 청년들마저 왜 삶의 희망을 잃게 되었을까?

입학했을 때 칼졸업을 외치던 내 대학생 딸은 취업을 하려면 아무래도 스펙이 모자란다며 일단 휴학부터 할까 하고 물었다. 대학에 오면 끝날 줄로만 알았던 스펙관리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며 지겨워하는 딸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내내 대입을 위한 스펙에 목매던 딸을 보고만 있던 내가, 내 학생들이 자소서 한 줄 더 넣고자 발로 뛸 때 방관했던 내가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용기 내어 딸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스펙이 존재 가치를 포장하는 순간부터 늘 다른 사람 스펙 수보다 몇 개가 적은 마이너스 인생을 살게 된다고, 당당한 자신이 되는 자존감이 진짜 스펙이라고.

그간 대학은 학생들에게 남들 따라하는 스펙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여유가 없었다. 대학 역시 스펙 쌓기에 바쁘다. 교육부 평가나 세계 대학 랭킹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평가에 걸맞은 스펙이 중요하다. 게다가 순위 평가기관마다 기준이 제각기다. 평가기관들은 랭킹을 올리기 위한 노하우를 소개하는 값비싼 컨설팅을 제공한다. 대학도 남들이 뛰니까 덩달아 뛰는 학생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컨설팅을 받아서라도 스펙을 갖춰야 한다. 우리 모두는 스펙 부풀리기의 노예가 되어있다. 랭킹 조금 올라간다고 소속 대학생들의 존재감은 전혀 높아지지 않는다. 대학본부 보직교수들의 스트레스 지수만 높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들은 평가 무한경쟁에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몇 해 전 독일에서 온 방문교수가 내게 물었다. 각종 대학 순위 평가에 허덕이는 한국 대학 교수들은 어떻게 교육의 질을 높이느냐는 질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독일의 대학들은 어떠냐고 물었다. 독일의 대학들은 의미 없는 대학 순위 평가에 대부분 참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교육과 연구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말도 남겼다.

다음 학기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떠나는 딸이 내게 오더니 재미있는 과목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라며 신나 했다.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딸에게 들어보지 못한 얘기였다. 다시 나의 원죄가 떠올랐다.

누구나 대학에 오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믿는 진리에도 침 튀기며 나는 아니라고 우겨대는 배짱도 부려야 한다. 그게 대학에서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아보는 묘미다.

모름지기 대학의 교육은 동굴 밖 진짜 나의 이데아를 발견하도록 돕는 일이다. 남들 스펙을 따라 쌓다가, 4년이 모자라 몇 년씩 휴학하면서 스펙 수 늘리기에 매진한다면, 자신의 이데아를 통째로 매장하는 일이다. 이데아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다. 자신의 생명은 아무도 대신 살 수 없듯이.

대학은 이러면 모두 죽는다고 선포했어야 했다. <응답하라 2004> 드라마가 해피엔딩이 될 수 있는 길은 아직 남아있다.

지금이라도 원죄를 깨닫고 청년들의 가슴부터 보듬어야 한다. 이 땅의 청년 누구나 무한히 존중받을 만한 생명과 자신만의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을 절대로 스펙 따위로 덮어버리지 말라고. 대학이 알려주지 못해도, 세상의 온갖 문제를 해결할 다양한 방식이 바로 자신 안에 숨겨져 있다고. 위기는 기회이고, 기회의 주인공은 남들 따라 살지 않는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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