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장관, 관료주의에 투항?

2018.09.21 19:23 입력 2018.09.21 19:32 수정

<전원일기>의 한 에피소드. 양촌리 김회장댁 차남인 용식의 아들 수남이 공부 때려치우고 농사나 짓겠다며 떼를 쓴다. 용식은 수남을 개울가로 데려가 대뜸 씨름시합을 청한다. “아버지를 이기면 농사짓게 해주마.” 수남은 다 늙은 아버지 자빠뜨리는 게 뭐 대수냐 싶어 순순히 샅바를 잡지만, 순식간에 몸이 번쩍 들려서는 개울에 던져진다. 물에 빠진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울분을 토한다. “농사가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 이 늙은 아비도 못 이기면서 그 힘든 농사일을 하겠다고?” 코끝이 찡했다. 아버지 용식을 연기하는 저 배우는 농사꾼의 애환을 잘 알겠구나 싶었다. 그 배우는 훗날 문체부 장관이 되어 국민과 문화예술인들 위에 군림하며 막말과 욕설을 일삼았다.

[시선]도종환 장관, 관료주의에 투항?

고등학교 때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처음으로 심어준 시가 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라는 이 절절한 문장에 마음이 먹먹했다.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향한 사랑을 노래한 이 시인은 사회 약자들의 슬픔을 잘 헤아리겠구나 싶었다. 그 시인은 훗날 문체부 장관이 되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연루된 공무원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자리가 사람을 바꾸는 걸까. 전직 장관의 살벌했던 민낯보다 현직 장관의 ‘변모’가 더 씁쓸하다. 문화예술인들 입장에서 장관의 인지부조화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친일로 전향하여 ‘조선인 개조론’을 주장한 변절만큼 충격적인 것이다. 그 자신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권력의 폭압에 맞서 싸웠던 문화예술계 투쟁의 아이콘이 아닌가. 블랙리스트 연루자들을 구제해주더니 정작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비정규직 예술강사들의 목소리는 외면하고 있다. 길 앞을 막아선 한 예술강사의 항의로부터 그 자리를 날쌔게 피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상위 기관인 문체부가 ‘셀프 면책’이라는 도덕적 해이에 빠졌으니 산하기관들은 오죽할까. 공석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에 배우 출신 최종원 전 국회의원 하마평이 무성하다. 블랙리스트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는 정대경 한국소극장협회 이사장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 정권에서 예술인들이 검열과 탄압을 당할 때 침묵으로 일관해 연극계 후배들로부터 지탄받은 이다. 알아서 물러나야 한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대표 정희섭)도 시끄럽다. ‘예술인파견지원사업’ 활동보고서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200여명의 참여예술인에게 한 달 급여를 미지급했다. ‘10일 30시간 활동’이라는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데, 활동보고서에 사진이 누락된 단순 실수마저 허위보고로 몰았다. 예술인들이 활동을 증명할 객관적 증거를 제출했지만 주관적 해석으로 묵살했다. 그러면서 ‘예술인인증시스템’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지난해 11월 JTBC 보도에 따르면, 시장 축제와 경로잔치 전단을 위조해 재단으로부터 ‘음악가’ 인증을 받은 사기꾼들이 예술 지원금을 타냈다고 한다. 가짜 예술인들을 걸러내기 위해 위촉한 재단 심의위원들이 지원금을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유료 세미나를 열기도 했단다. 예술인복지재단은 지난 정권 블랙리스트 범죄에 앞장서서 관여했는데, 얼마 전 통렬하게 반성한다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사과 쇼’였을까? 지금의 행보는 또 다른 ‘블랙리스트’나 마찬가지다.

정권은 바뀌어도 관료들은 ‘그때 그 사람’들이다. 그게 문제다. 현 장관도 관료주의에 투항하고 말았다. <전원일기>의 대사를 바꿔본다. “행정이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 이 썩어빠진 관료주의도 못 이기면서 그 힘든 공직을 수행하겠다고?” ‘접시꽃 당신’의 시구는 이렇게 고쳐 읽어본다. “나 하나 육신의 영달과 명예로 일어서야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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