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대학코리아동창회

2018.10.05 21:13 입력 2018.10.05 21:15 수정
배훈 일본변호사 재일코리안2세

일본 교토대학 혼조 다스쿠 교수가 올해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교토대학은 1949년 일본인 첫 노벨상(물리학) 수상자인 유카와 히데키를 시작으로 졸업생, 교수 등 노벨상 수상자를 10명 배출한 곳이다. 자연과학 분야만 계산하면 일본 대학 가운데 1위다. 왜 교토대학 출신 노벨상 수상자가 많을까. 이 대학에서 대학생활 4년을 보낸 내 경험에 비춰보면 이렇다.

[시선]교토대학코리아동창회

우선 학교 분위기가 매우 자유롭다. 선배나 후배를 부를 때도 ‘상(さん)’을 붙인다. 독특한 자기주장이 용인된다. 이상한 사람이나 특이한 사람이라는 말은 칭찬이고 미친 사람은 최고 찬사다.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기 분야를 선택해 연구하고, 거리낌 없이 자기분야를 넘어 연구자들과 교류한다. 이렇게 혁신이 탄생한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증거다.

다음으로 1000년 넘게 수도이던 교토에서는 귀족적인 분위기가 우러난다. 도회지라기보다 시골에 가깝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도 아니고 경주도 아닌 곳이다. 오래된 도시에 사는 교토 사람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상업도시인 오사카나 도쿄 사람들에 비해 폐쇄적이다. 그래서 일류 문화인이나 연구자들을 소중히 여긴다. 정치·경제 중심인 도쿄에는 없는 연구환경이다.

내가 교토대학에 들어간 때가 1973년이다. 신입생 가운데 자이니치 코리안은 13명이었다. 입학해보니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한국문화연구회(한문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조선문화연구회(조문연)가 각각 신입생 회원을 모집했다. 두 연구회는 코리안으로 이뤄졌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조직으로서는 대립했다. 나는 한문연을 택했다. 우리말, 한국근현대사, 일본근현대사, 재일코리안의 체류자격 문제 등을 선배들에게 배웠다. 당시 학습과 체험이 지금 나의 원점이다. 지금은 한문연도 조문연도 없다. 사회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역사적 역할이 끝난 것이다.

한국인들이 교토대학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거쳐 1937년 교토제국대학조선인동창회가 태어났다. 유학생 40여명이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만들었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벌이며 전쟁에 열을 올리던 무렵이다. 이때 독립운동가 송몽규도 교토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1945년 조국광복, 1948년 남북한 분단, 1950년 한국전쟁, 1953년 정전협정, 1965년 한일협정 등 격동하는 본국 정세에 휩쓸리며 동창회는 이어졌다. 그러다 1972년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평가가 갈리면서 동창회는 휴회한다. 1985년에야 조국통일을 바라는 선배들이 교토대학통일동창회로 동창회를 재건했다. 21세기 들어서 2010년에 교토대학코리아동창회로 이름을 바꿨고 2017년 일반사단법인이 됐다.

현재 교토대학에는 2017년 기준 291명의 한국인이 있다. 인구가 한국 인구(약 5000만명)의 약 27배(약 14억명)인 중국은 1146명에 불과하다. 한국인 비율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과거 동포 졸업생 가운데는 정치적 신념에 따라 남북 조국으로 돌아가 활약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조국에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서의 삶을 선택한 재일코리안이 동창회를 지켜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한국에서 온 연구자와 유학생은 물론 중국 조선족 유학생도 적잖다. 러시아 사할린에서 온 고려인 유학생도 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동창회 회원자격을 재일코리안뿐 아니라 조선족과 고려인 등 코리안을 포함하도록 했다. 해마다 열리는 신입생 환영회와 총회에 많은 유학생들이 참여한다. 요즘 한국에서는 취업난이 심각하지만 반대로 일본에서는 인력난이 심각하다. 한국인 유학생들을 원하는 일본기업이 많다. 이 때문에 졸업 후 일본에 자리잡는 유학생도 많다. 앞으로는 이들이 동창회를 담당할 것이다. 지난 100년 일본사회 코리안의 역사도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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