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노동4.0’ 정책이 주는 가르침

2018.11.19 21:13 입력 2018.11.19 21:15 수정

[정운찬 칼럼]독일의 ‘노동4.0’ 정책이 주는 가르침

오늘날 우리가 가끔 접하는 백서(white paper)에는 오랜 역사가 담겨 있다. 19세기 영국 정부는 의회에 제출한 정부보고서 표지를 흰색으로 했으며, 이는 20세기 들어 보편화되었다. 원래 백서는 내용이 어떻게 바뀔지 몰라서 표지를 흰색으로 했다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기관 또는 부문의 활동을 정리한 종합보고서로 발전되었다. 예를 들면 금융 부문에서는 래드클리프보고서(Radcliffe Report)나 윌슨보고서(Wilson Report) 등 영국의 금융개혁을 위한 백서가 많다.

[정운찬 칼럼]독일의 ‘노동4.0’ 정책이 주는 가르침

한편 정부정책안을 검토하기 위해 만든 임시적 문서를 녹서(green paper)라고 하는데, 초록색 표지의 녹서는 정부가 대중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주요국에서는 중요한 정책의 경우 백서를 발간하기 전에 녹서를 먼저 만들었다는 것이다. 녹서가 공론화된 질문을 담고 있다면 백서는 사회적 합의를 통한 대응책을 담아 정책결정과정의 연계성을 높이는 것이다.

최근 독일의 ‘산업(Industrie)4.0’과 ‘노동(Arbeiten)4.0’은 녹서와 백서의 연계성을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독일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저출산에 따른 숙련노동인구 감소와 디지털화에 따른 기존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에 대응하기 위해 자본 및 노동 분야에 대한 국가적 전략을 수립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점을 담은 녹서와 이에 대한 대응책을 담은 백서가 나온 것은 ‘독일적 꼼꼼함’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독일은 경쟁국의 기술추격과 신흥국 대비 가격 열위라는 환경에서 제조업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2011년 차세대 산업전략을 제시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불씨를 먼저 댕긴 것이다. 그 중심에는 다품종 대량생산이 가능한 유연한 생산시스템이 있으며, 이를 위해 필수적인 사물인터넷과 사이버물리시스템(CPS) 기술에 산업부흥정책을 위한 자본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산업4.0’을 2012년 발표하였다.

독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자본의 역할과 더불어 노동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노동 분야의 전략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노동4.0’이었다. 우리가 눈여겨볼 점은 이 경우에도 2015년 문제점과 필요사항을 집대성한 녹서를 먼저 만들고 2016년 11월 이에 대한 해법으로 백서를 발간했다는 것이다.

백서의 핵심은 자본의 선진화에 상응하는 노동의 디지털화를 위한 노동정책 추진이다. ‘산업4.0’의 성공을 위해서 ‘노동4.0’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의미다. 자본 집적에 의한 인공지능화, 생산의 자동화로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일자리 교육을 통해 양질의 노동력을 확보하고 디지털시대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여 ‘산업4.0’으로 대변되는 자국 산업의 경쟁우위를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노동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모색이다.

역사적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노동4.0은 18세기 말 산업사회와 최초의 노동자단체 설립(노동1.0), 19세기 후반 대량생산과 복지국가의 시작(노동2.0), 1970년대 이후 사회적 시장경제의 변화(노동3.0)에 이어 디지털 기술과 유연한 노동방식의 증가로 대변할 수 있는 흐름을 말한다. 노동4.0은 디지털화되어가는 생산구조에서 노동의 몫을 유지하기 위한 생산이익의 분배, 공공재와 서비스의 현대화 등 거시경제적인 차원에서 노동정책을 만드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독일의 노동4.0이 현재 우리의 상황과는 다르겠지만 우리도 다음과 같은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지속가능성장을 통해 일류국가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노동4.0 백서는 녹서에 담긴 문제점들에 대해 2년에 걸쳐 노조와 사용자,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토의와 연구를 지속한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경제활동 변화가 고용에 미치는 영향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새로운 직업형태 △빅 데이터와 데이터 보호 △인간노동과 기계노동력 사이의 관계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고용보험의 개편, 새로운 산업 분야의 유연한 근무시간 조정, 안전위생을 통한 양질의 근로조건 개선 등을 노동정책으로 제시하였다. 우리는 디지털화, 세계화, 인구통계학적 변화와 문화적 충격 등의 요인에 대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간의 치열한 논의를 통해 정책적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다음으로 노동4.0 백서는 ‘디지털시대의 양질의 일자리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다. 이것은 독일 노동시장 내에서 일어나는 변화들과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그 결과들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자동화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드는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산업4.0시대에 대한 대책은 일자리를 잃게 될 노동자들을 위한 전직훈련과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학교 등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를 위해 노동시장의 규제완화와 합리적인 세제 정비를 전제로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와 교육이 최우선 과제라고 설명하고 있다.

노동4.0 백서의 서문을 보면 ‘미래의 노동’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오늘날 우리가 정상적으로 간주하는 현상은 미래에는 잘못된 허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또한 미래의 노동에 대한 전망과 시나리오들, 그리고 인간에게 유용한 이익을 가져다주며 우리 경제를 성큼 앞으로 나가게 해줄 신성한 직업으로서의 ‘노동’을 다루었다. 미래의 노동을 과거 경험과 기존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우리만의 노동4.0을 위해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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