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박탈감과 절대적 억울함

2018.12.28 20:37 입력 2018.12.28 20:41 수정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이자 새 정부의 국정 철학이다. 이미 1년 반이 흐른 지금, 과연 우리는 이 약속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자유한국당 소속 권성동·염동열 의원이 공기업인 강원랜드 채용청탁 및 수사외압 의혹을 받았다. 공기업만이 아니었다. 은행권도 채용비리로 행장을 포함, 수십 명이 구속·기소되었다. 높은 분, 힘센 분, 가진 분의 전화 한 통화에 합격된 이가 있은 반면, 아무 ‘빽’ 없던 수많은 취준생들은 오로지 ‘노오력’에 ‘노오력’을 거듭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듯 했다. 더 많은 이들은 거듭 탈락했다. 지금도 기회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세상읽기]상대적 박탈감과 절대적 억울함

과정은 어떤가? “(힘겹게 취업한) 회사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살았는데 2017년 12월, 갑자기 회사 측이 비정규직(무기계약직)을 1250명이나 정규직으로 전환시켰거든요. (무시험으로) 그냥 면접만으로. 그게 저희는 억울한 거죠.” 공기업인 서울교통공사에서 일하는 정규직의 한탄이다. 그에게 기회와 과정은 불공정했다. 그래서 억울하다.

비슷한 방식으로 기간제 교사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려던 정부의 노력은 2017년 여름, 정규직 교사나 임용고시 준비생의 반발로 무산됐다. “지금도 노량진 고시촌에서, 도서관에서 불철주야 공부하는 고시생들에게 박탈감을 주는 어이없는 정책입니다. 교사가 되고 싶다면 임용시험을 보면 됩니다. 모두에게 공정한 시험을 말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에 올랐던 ‘기간제 교사 및 강사의 정규직화를 반대합니다’라는 호소문이다.

이러니 새 정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내세우는 것은 매우 불편할 뿐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분노를 키운다. 부자나 권력자들이 누리는 어마어마한 기득권에 대해 일반인들이 느끼는 것과는 좀 다른 결의 ‘상대적 박탈감’이다. 나는 개고생해서 합격했는데, 저들은 공짜로 정규직이 되니, 억울하고 분하다.

결과의 정의로움 역시 아직 갈 길이 멀다. 얼마 전 24살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석탄을 옮기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생명을 잃었다. 그 어머니는 “성실히, 열심히 일하라고 했는데 그 결과가 죽음”이라며 “내가 아들을 죽였다”고 절규했다. 약 7년 전, 삼성전자 LCD공장에서 일하던 26살 김주현씨는 화학약품 공정에서 피부병까지 얻어 우울증에 빠진 뒤 끝내 투신자살했다. 그 아버지는 “삼성에 입사한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힘들다’고 울며 이야기하는 아들에게 ‘조금만 더 참아라, 좋아지겠지’라는 말만 했다”며 결국 “삼성이라는 두 글자에 속아 제가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만 같다”고 했다. 사회 전반의 자산·소득 불평등 못지않게, 참고 견디며 열심히 일한 결과가 우울과 죽음이라면 이 또한 정의가 아니다. 오죽하면 2015년 408일 굴뚝농성에 이어 파인텍 노동자들이 2018년 연말 또 신기록을 냈을까?

이런 면에서 우리는 ‘헬조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회는 불평등하고, 과정은 불공정하며, 결과도 정의롭지 못하다. 이 현실을 어쩌나? 과연 정부가 ‘노오력’을 더 많이 하기만 하면 기회도 평등해지고 과정은 공정해지며, 결과는 정의로워질까? 만일 민주당이 아니라 정의당 등 진보 정당이 집권하면 명실상부 그렇게 될까? 내 생각엔 우리가 가진 평등·공정·정의의 개념 자체가 근본 전환이 되지 않으면 같은 오류가 반복된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크리스토퍼 보엠은 <숲속의 평등>에서 세계 각지의 초기 인류(수렵채집인과 부족민)가 정교한 평등주의 문화를 창조함으로써 집단 생존과 진화를 해왔다고 한다. 인간 집단 내 위계의 발생 자체는 불가피하더라도 우상숭배, 탐욕, 이기주의, 탈법자, 권력자 등의 부상을 아래로부터 감시·견제함으로써 공생의 문화를 실현한 것이다. 지금도 인도네시아 라말레나 마을은 고래잡이에 참여한 모든 이가 그 결실을 고루 나눔으로써 특정인이 독과점하는 것을 처음부터 예방한다. 행운이건 능력이건 골고루 나눌 때 공동체는 지속가능하다. 고미숙 고전평론가가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에서 말하듯, 독점이 아니라 공유, 축적이 아니라 순환을 해야 그 공동체가 돈맥경화(부의 흐름이 막히는 상태)를 예방하고 우애를 북돋는다.

이런 문화를 온 사회가 새로 만들어야 상대적 박탈감과 절대적 억울함, 즉 인간적 소외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상대적 박탈감이란 타자와의 공존이 아니라 비교나 경쟁에서 비롯되며, 절대적 억울함 역시 자기 존재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새 문화를 필요로 하는 까닭은 이 심리적 상처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메커니즘 속에서 을과 을, 병과 병이 상호 분열·경쟁하는 가운데, 결국 갑(자본)의 전일적 지배를 영속화하기 때문이다. 상품·화폐·자본 가치를 넘어선 평등·공정·정의의 길이 인간성 소외를 해체한다. 아프지만,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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