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이후’가 보이지 않는다

2019.10.04 20:17 입력 2019.10.04 20:25 수정

지인들과 각종 차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중 여성 채용 차별은 심각하다. 어느 회사든 여성 응시자에게는 결혼과 출산 계획에 관한 질문이 ‘지긋지긋한 관절염’처럼 나온다는 이야기, 이름만 대면 아는 어느 기업에서는 아예 “남자를 더 많이 뽑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면접을 진행하더라는 이야기들이 도시 괴담처럼 흘러나온다. 슬프게도 그 괴담은 실제 상황이다.

[시선]‘조국 이후’가 보이지 않는다

지하철 1~4호선을 운영하는 서울 메트로는 서울 교통공사로 통합되기 전인 2016년, ‘모터·철도 장비 운전’ 분야와 ‘전동차 검수 지원’ 분야 응시자 중 최종 합격권에 든 여성 지원자 6명의 면접 점수를 50점 아래로 수정하여 최종 불합격시켰다. 면접에서 87점을 받아 1등이던 여성 지원자의 점수는 48점으로 깎였다. 최근 대전 MBC 여성 아나운서들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성차별 채용에 관한 진정서를 냈다. 이 진정서에 의하면, 16개 MBC 지역계열사에 근무하는 여성 아나운서 40명 가운데 정규직은 11명(27.5%)뿐이지만, 남성 아나운서는 전체 36명 가운데 31명(86.1%)이 정규직이다. 이런 성차별 채용 사례가 어디 이뿐이랴. 몇 년 전에는 국민은행과 KEB하나은행 등 금융권에서 서류전형에서 여성 지원자의 점수를 낮추고, 남성 지원자의 점수를 높이는 방식으로 채용 비리를 저지르다 적발되었다. 한국가스안전공사, 대한석탄공사 등 공기업도 이 분야에서는 한패다. 불공정은 어느 특권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명백하게 채용 불공정 사례가 적발되면 ‘공정’을 최종심급으로 여기는 20·30세대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야 한다. 기회도 평등하지 않고, 과정도 공정하지 않고, 결과도 정의롭지 않은 일이라 분노해야 마땅하다. 이미 회사에 합격한 남성 직장인들은 불의한 채용 관행과 제도가 열심히 노력하여 합격한 자신들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촛불을 들어야 한다. 적어도 20·30세대에게 ‘공정세대’라고 호들갑스럽게 이름 붙인 최근의 세대 분석이 맞다면 말이다. 그러나 조용하다. 이런 뉴스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요즘 세상에 성차별이 어디 있냐”고 분노하며 ‘나도 피해자’임을 자처하던 남성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이런 경우도 있다. ‘조국 논란’에 분노하여 촛불집회를 진행하는 고려대 집회 집행부에 분교인 ‘세종캠’ 학생이 1명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쟁으로 번졌다. 격론 끝에 ‘민주적인’ 투표로 해당 학생은 오픈채팅방에서 퇴출당했다. 화르르 타오르던 불공정한 계급 세습을 향한 분노가 ‘학벌 계급’ 앞에서 허무하게 꺼져버린 것이다. 이들에게 공정이란 과연 무엇일까?

배신을 일삼는 조폭들이 유난히 의리를 강조하거나, 사랑과 정의를 말하는 교회가 혐오와 불의의 공간이 된 것처럼 누군가 혹은 어느 집단이 특정한 단어를 자주 부르짖는다면, 도리어 그것의 결핍을 의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치 시대정신인 것처럼 곳곳에 덕지덕지 난무하는 ‘공정’이라는 가치도, 분열된 ‘개혁’도, 광화문광장을 점령한 ‘자유 민주주의’도 결핍의 징후일 수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는 이런 개념들이 부족하기보다는 애초에 그게 무엇인지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각자의 정의를 칼처럼 휘두르며 치킨 게임을 하는 것이다. 이 게임은 언제 끝나며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두 달 넘게 ‘조국’의 조국이 된 사회를 살아가는 피로감이 크다. 그보다 ‘조국 이후’가 도통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절망이 깊다. 조국 논란을 통해 되레 우리 사회가 공정, 정의, 선에 관한 공통의 감각이 구축되어 있는가, 그것을 실천할 시민의식이 있는가에 관한 회의적 질문을 하게 된다. 광장에 몇 명 모였는가 경쟁하듯 자랑할 게 아니라 이제는 조국의 외연을 확장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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