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들을 지키지 못하는 항구

2019.10.06 20:51 입력 2019.10.06 20:53 수정

태풍이 오면 항구를 떠나야 하는 이상한 항구가 있다. 서귀포 강정마을 ‘군과 민간이 공존하는 민군복합형관광미항’. 올해 가을 몇 차례 태풍이 제주도를 강타하는 동안 항구에는 단 한 척의 군함도, 크루즈선도 없었다. 이곳의 선박들은 부산항, 진해항, 제주항 등 안전한 정박지를 찾아 ‘피항’했다. 태풍을 정면으로 맞이하는 법환마을, 강정마을, 범섬 입지에 해군기지를 건설한 이유가 뭘까. 군사기지로서 은폐가 불가능한 ‘곶’의 지형에 위험한 항구를 왜 만들었을까.

[NGO 발언대]배들을 지키지 못하는 항구

해군은 2009년 ‘기본계획보고서’와 ‘환경영향평가서’에 제주 해군기지 후보지별 입지타당성 평가를 공개한 적이 있다. 화순, 위미 등 8곳의 후보지 중 강정마을이 최고점을 받았다. ‘직선형 해안’이고 ‘배후 도로와 교통여건은 다소 불리’하지만, ‘매입지 주변에 민가가 거의 없고 주민과의 마찰 최소’가 장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지난 10년 동안 경찰에 연행된 ‘강정 지킴이’는 700명이 넘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강정 주민에게 34억원 구상권을 청구하기도 했다. 2012년 태풍 볼라벤으로 50억원짜리 방파제 케이슨 6기, 2014년 태풍 너구리로 케이슨 3기가 완전히 훼손되었다.

여러 논란에도 제주 해군기지는 2016년 준공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전한 항로가 없었다. 지금까지 ‘쉬쉬’하며 부랴부랴 ‘길도 없는 집’을 만든 것이다. 2012년 국가정책조정회의는 ‘보다 더 안전하고 원활한 입·출항을 보장하기 위해’ 신규 30도 항로를 결정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제주특별자치도와 해군은 2012년 결정에 따르지 않았다. 올해 제주도는 15만t급 대형 크루즈선 입·출항을 위해 시급히 신규 항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해군도 항공모함을 운용하려면 ‘기존 77도 항로’보다 안전한 새로운 길이 필요했다. 신규 항로는 최소 15~18m 수심이어야 한다.

새로운 길을 내려니 또 다른 암초가 나타났다. 신규 항로에 10m 전후 저수심 암반 지역이 폭넓게 발견된 것이다. 제주도는 수중 발파해 길을 내겠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런데 문화재청이 그 계획을 불허하였다. 그 암초가 국내 연산호 최대 군락지 ‘산호정원’이기 때문이었다. 밤수지맨드라미, 검붉은수지맨드라미, 해송, 긴가지해송 등 멸종위기야생생물과 천연기념물의 존재는 해군이 작성한 환경영향평가서에 명시되어 있다. 또한 제주도와 해군은 신규 항로가 천연기념물 제421호 문섬범섬천연보호구역, 제442호 제주연안연산호군락,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핵심지역을 훼손할 것이란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비상식적, 폭력적 절차로 제주 해군기지는 고삐 풀린 채 강행되었다. 평화롭던 강정 주민을 쫓아내고 구럼비를 발파했다. 강정 등대와 서건도의 산호 생태계는 매립되고 사라졌다. 회복할 수 없는 피해는 고스란히 연약한 것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만들어둔 집도 태풍이 오니 모두 떠나버렸다.

대양해군, 자주국방을 외친 위정자들은 강정 주민과 싸웠다. 국가안보가 위기상황인데 아직도 연산호 타령이냐고 비아냥거렸다. 제주 해군기지 논란은 10년 이상 되었지만, 아직도 진행형이다. ‘신규 30도 항로’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일으킬 것이다. 지금이라도 지난 잘못을 통렬히 반성하고 제주 해군기지를 유지할지 말지, 엄밀히 재평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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