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구하라를 죽였나

2019.12.12 20:34 입력 2019.12.12 20:37 수정

지난주 개인 휴가차 가족과 아이슬란드 여행을 다녀왔다. ‘골든 서클’ 일일투어를 도와주는 현지 남성이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자, 곧바로 이렇게 응답했다. “제가 며칠 전 BBC 뉴스에서 여성 K팝 가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구하라였다. 자신은 K팝을 들어 본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기사를 보니 이 여성 가수가 스캔들에 휘말리고 사건을 공론화하고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많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분에게 또 다른 K팝 여성 가수인 설리의 안타까운 죽음 사건도 설명하면서 한국에서 여성에 대한 악성댓글과 불법 동영상 촬영이 얼마나 만연해 있고, 가해자 처벌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알려주었다.

[세상읽기]누가 구하라를 죽였나

한국으로 돌아와서 BBC 기사를 찾아 읽어보았다. 제목은 “구하라와 남한의 불법촬영 희생자들의 트라우마”였다. 기사는 먼저 가명으로 처리된 은주라는 여성이 당한 불법촬영 사건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가해자는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 남성 동료였다. 그는 여성 탈의실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불법으로 카메라를 설치한 후 옷을 갈아입는 여성들을 지속적으로 촬영했다. 이 남성은 나중에 한 여성의 치마 속을 촬영하다 경찰에 체포됐고, 그의 휴대폰에서 불법으로 촬영된 여성 피해자들의 영상이 나왔다. 은주씨도 그들 피해자 중 하나였다. 은주씨 부모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사건이 있고 난 후 딸은 악몽에 시달렸고, 심각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었다. 그럼에도 직장 주변에서 누구도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은주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검사는 불법촬영 범행을 한 가해 남성에게 2년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BBC 기사는 구하라가 극단적 선택을 한 계기가 단지 전 남자친구인 최종범의 성관계 불법촬영 및 유출 협박과 폭행 때문만은 아님을 강조한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실질적인 원인은 법의 정의에 호소했던 마지막 희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오모 부장판사가 재판과정에서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은 가부장적인 태도, 피해여성이 느끼는 고통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판결문, 가해자가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결과, 그 상황을 가십성으로 보도하는 언론과 대중들의 악성댓글이 아마도 구하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더 큰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BBC 뉴스의 핵심 논조이다. 한국 언론들은 이러한 해외 언론의 문제의식에 비해 얼마나 이 사건을 진지하게 다루었는지 의문이다.

BBC 기사는 은주씨 부모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요”라는 문장을 기사 중간의 소제목으로 달았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아마도 지금도 여성을 불법촬영하거나, 불법촬영된 영상을 보고 있는 남성들일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불법촬영 피해 여성들의 고통을 알고도 모른 체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동료들일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사건의 진실보다는 가십성 뒷이야기에 더 관심을 갖는 기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마도 소속된 연예인이 불법촬영 피해를 입어도 별일 아닌 걸로 무마하려는 기획사 대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성 상대 불법촬영과 성희롱 성폭력 사건에 대해 솜방망이 판결을 내린 남성 가부장 의식에 사로잡힌 대한민국 사법부일 수도 있다.

지난 2년간 한국에서 불법촬영 신고가 1만1200건에 달하지만 대부분 판결은 무죄 아니면 벌금형이다. 실형을 사는 경우는 극소수에 그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8년에 조사한 ‘불법촬영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뷰 대상자 2000여명 중 23%가 자살을 고려했고, 16%가 자살 계획을 세웠고, 이 중 23명의 여성이 실제로 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여전히 불법촬영 처벌에 대한 사법부의 태도는 안이하다. 한국과 달리 미국 메릴랜드주 법원은 수영장 파티를 열고 미성년자를 불러 탈의실을 불법촬영한 50대 남성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여성들에게 더 고통스러운 것은 2차 피해를 방치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직장, 언론, 연예계, 학계, 사법부에서 행해지는 잔인한 2차 가해. 과연 누가 구하라를 죽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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