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까지 포함한 평화

2020.02.28 20:36

코로나19와의 싸움이 당분간 우리 사회의 의제를 장악하겠지만 2020년은 사실 기념할 사건이 많은 해이다. 올해는 6·25전쟁 70주년,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노동인권운동 5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 6·15 남북정상회담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사건들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 가운데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권리는 어느 정도 성취되었다고 하더라도 평화는 아직 요원하다.

[세상읽기]바이러스까지 포함한 평화

평화는 전쟁의 반대이며 다툼이 없는 상태이다.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가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결국 6·25 70주년을 맞게 됐다. 그러나 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상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는지 묻는다면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지독한 삶의 경쟁과 극심한 남남 갈등으로 인해 일상의 평화를 확보하는 일은 평화체제 구축만큼이나 어렵다. 끈질기고 소모적인 진영 간 갈등은 코로나19 사태 앞에서도 수그러들 줄 모른다.

지난 세기의 평화에서는 안보와 이념갈등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평화를 깨트리는 존재는 외부이든 내부이든 눈에 보이는 적이었다. 일본, 북한, 미국, 중국, 자본가, 정치군인 등이 시대에 따라 시민 다수의 평화를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나 2020년 우리 일상의 평화를 깨트리는 존재는 머리카락 300분의 1 크기라는 코로나바이러스다.

단적인 예로 한국 가톨릭교회는 236년 역사상 처음으로 전체 교구의 미사를 중단됐다. 1784년 중국 베이징에서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한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일제시대, 한국전쟁 중에도 미사가 인위적으로 중단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코로나19가 6·25보다 더 위중하다는 뜻인가. 분명한 건 평화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유사 이래 바이러스는 늘 존재했고 대규모 인명 피해를 일으키거나 문명을 붕괴시키기도 했지만, 현재 코로나19는 인간과 바이러스의 전투에서 변곡점을 그렸다. 잠정 치사율 1% 안팎에다 조만간 백신이 개발되면 극복할 수 있음에도 정권의 안위를 흔드는 사안이 됐다. 더구나 전염병을 막는 데 유효하다는 투명한 정보공개, 민주주의, 언론의 자유는 바이러스와 정치를 더욱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기는 하지만 바이러스 자체로 우리 사회의 근간이 흔들릴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의 대응과 전문성은 내부가 아닌 외부의 시각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실수와 예단은 급박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정부는 특히 보수세력의 집요한 비판에도 섣불리 중국인 입국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우리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재앙에서 가장 약한 고리는 사회경제적 소외세력이다. 열악한 시설에서 생활하던 청도대남병원 폐쇄병동에서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정규직 노동자는 임금을 보장받으며 집에서 바이러스를 피할 수 있지만 자영업자는 다르다. 너무 높은 자영업 비율로 이미 경쟁력을 잃은 상점들은 깊은 불황에서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사이비종교의 문제가 있다. 이 종교는 앞날이 불안한 젊은이들을 주요 포교 대상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코로나19 이후의 사회를 상상해야 한다. 전염사태가 잠잠해지더라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 일상의 평화를 심각하게 해쳤던 바이러스까지 포함한 새로운 평화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평화는 안보와 이념갈등 해소뿐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 젊은 세대의 불확실한 미래, 신종 바이러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상태가 돼야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0년대 이후 ‘하나의 건강(One Health)’이라는 개념을 주창해 왔다. 1997년 홍콩을 강타한 조류독감을 비롯한 인수공통전염병 연구에서 시작된 ‘원 헬스’ 접근법은 인간과 동물의 건강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이제 환경의 건강까지 포함한다. 산업화, 도시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인간만의 건강은 보장되지 않는다. 신종 전염병의 대다수는 20세기에 나왔으며 이는 사람과 동물의 접촉 증가, 식품생산의 증대와 통합, 국외여행과 관련이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우리는 타인과 동물까지 포함해 모든 존재가 얼마나 깊이 연결돼 있는지 새삼 확인했다. 내 건강은 이웃이 건강하지 않으면, 생태계가 건강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 이 모든 것의 기반은 지구환경이다. 요컨대 질병은 의학의 문제인 동시에 경제, 사회, 환경의 문제이다. 이것을 통합 관리하는 정치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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