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 철탑 위의 삼백일

2020.03.23 20:38 입력 2020.03.23 20:42 수정

한 사람의 시간을 셈한다. 몇 번이나 세었을까. 오늘이 한달이다, 오십일이다, 백일이다, 이백일이다. 그렇게 쌓아온 시간이 곧 삼백일이 된다. 강남역 철탑 위,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의 시간이다. 1990년대 삼성항공(테크윈)에 입사해 노조설립을 주도하다 해고당한 그는 노조탄압과 부당해고에 대한 삼성의 사과와 복직을 요구하며, 작년 6월 철탑에 올랐다. ‘무노조 삼성’에서 노동조합을 시도했던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세상읽기]김용희, 철탑 위의 삼백일

“비노조 경영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그룹노사전략’을 수립하고 에버랜드 내 상황실을 설치하여 노조설립을 시도하는 근로자들을 상당 기간 감시하면서 그들의 사생활 비밀을 함부로 빼내고, 징계사유를 억지로 찾아내어 징계하여 회사에서 내쫓으려 하거나 급여를 깎아 경제적 압박을 가하게 만들고,…노조 활동을 한 근로자들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려 한다는 이유만으로 회사 내에서 적대시되고 그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게 된다.”

삼성 에버랜드 노조와해 사건 판결문의 일부다. 김용희에게 일어난 것도 이러한 일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삼성 경영진의 인식을 19세기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에 등장하는 산업도시 코크타운의 공장주에 비유했다. 이 19세기적 노동탄압 사건은 작년 12월 7년 만에 유죄 판결을 받았고, 당시 삼성 미래전략실에서 사건을 주도했던 관련자들은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삼성의 조직적인 노조파괴 행위는 김용희 같은 피해 노동자들의 끈질긴 증언과 투쟁이 없었다면 세상에 드러날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스페인, 영국, 독일,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이 ‘코로나 파업’을 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감염 위험에도 작업을 강행하거나 노동자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는 회사에 항의하고 대책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파업을 할 수 있을까? ‘노동자들의 위기를 막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는 60일간 해고를 금지하고 덴마크 정부는 임금 보전을 요구하는데, 한국에선 ‘기업의 위기를 막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당한다. 이 차이는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코로나19 사태는 동물들이 위험에 처한 곳에서는 인간도 안전할 수 없고, 노동자가 아픈 곳에서는 다른 시민들도 건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안전망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안전망이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를 당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현실이 계속되는 한, 쿠팡맨이 쓰러져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고 콜센터 노동자들이 집단감염되는 이 현실도 끝나지 않는다. 김용희의 현실은 우리의 현실이다.

최근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 공여 및 횡령 사건 파기환송심을 앞두고, ‘삼성준법감시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지난 3월11일, 이 기구는 삼성그룹이 과거의 노조와해공작 등 노동탄압 문제에 대해 반성하고 국민들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삼성이 정말로 반성의 의지를 보이려면, 제일 먼저 김용희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는 삼성에 의해 파괴당한 노동조합과 노동자를 상징하며, 노동자로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들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김용희의 삼백일은, 삼성이 침묵한 삼백일이다. 김용희의 철탑 위 시간이 길어질수록 삼성의 죄도 그만큼 무거워진다. 사태를 묵인하고 방관한 정부와 여당도 마찬가지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의 2대주주다. 의지만 있다면 구할 수 있다. ‘국민’의 한 사람인 노동자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며 버티고 있다. 그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며, 우리는 언제까지 그의 사위어가는 몸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4월4일, 삼백일이 된다. 이제 응답하라. 김용희가 철탑 위에 있는 한, 삼성의 노조파괴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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