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난생처음 한 단행본에 추천사라는 걸 쓰게 되었다. 폴리아모리스트 홍승은씨가 자신의 두 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신작 에세이집에 말이다. 처음 추천사를 요청받고 나서 몇몇 지인에게 이 얘기를 전하자, 그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네가 폴리아모리에 대해 뭘 안다고 그에 관한 책에 추천사를 써?” 맞다. 나는 현재 모노아모리적 연애 관계를 맺고 있고, 폴리아모리는 나에게 다소 낯선 무엇이다. 그런데 낯설고 잘 모르는 것을 대하게 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기본적 자세는? 존중하고, 경청하며,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원고를 읽었고 그리고 썼다.

[시선]사랑과 편견

독점적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들 대다수는 폴리아모리에 대해 어떤 ‘편견’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편견을 뜻하는 영어 단어 ‘prejudice’가 일종의 ‘사전 판단’ 내지 ‘선험적 판단’을 의미한다면, 이런 의미에서는 폴리아모리에 대한 모노아모리스트들의 편견에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존재하니까. 따라서 중요한 건 어쩌면 편견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에게 편견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아는 것 그리고 소통과 배움을 통해 그러한 편견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변화시켜 나가려는 태도일 것이다.

지난 4·15 총선에서 이루어진 한 지역구 후보자들의 토론회 중, 우리는 불행히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시 마주해야 했다. “동성애에 대한 의견은 어떻습니까? 저는 반대합니다.” 책의 저자는 또 어떤 이로부터 “자신은 폴리아모리를 안 좋게 생각하고, 그건 존중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난센스인 건 기본적으로 ‘옳음’(the right)의 문제를 ‘좋음’(the good)의 문제와 뒤섞어버렸기 때문이다. 옳음은 사회정의와 관련되기에 보편성의 추구를 특징으로 하지만, 좋음은 자아실현과 관련되기에 다양성의 추구를 특징으로 한다. 사랑은 당연히 좋음과 다양성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더 좋은 사랑은 있을 수 있지만, 그 누군가가 자신에게 좋은 사랑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타인에게 좋은 사랑을 반대할 권한은 없다. 우리는 흔히 맑은 날 날씨가 ‘좋다’고 말하며, 누군가는 실제로 맑은 날을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흐린 날을 좋아하고 비 오는 날을 사랑한들 누가 뭐랄 것인가?

한때 ‘사랑을 책으로 배웠다’는 말이 일종의 조롱처럼 회자되던 적이 있었다. 이런 조롱 속에는 사랑이란 굳이 배우지 않아도 본능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랑을 ‘굳이’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게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배우지’ 않고도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없다. 굳이 배우지 않을 때, 우리는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기존의 관습적 사랑과 행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은 책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겠지만 책으로도 배워야 한다. 그것은 감정일 뿐만 아니라 또한 관계이므로. 나는 그녀의 책을 읽고 나면, 우리가 이전보다 좀 더 나은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제목은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이달 말 출간 예정인데, 많은 분들이 함께 읽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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