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특별시’민입니까

2020.08.10 03:00 입력 2020.08.10 03:01 수정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은 셋집에서 서울 살림을 시작한 어머니가 갖은 고생 끝에 집을 마련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리저리 돈을 융통해 서대문구 현저동 꼭대기에 허름한 집을 한 채 마련한 어머니는 “기어코 서울에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이라며 감개무량해한다. 사대문 밖에 집을 장만한 어머니의 소원은 자식들을 출세시켜 ‘문안’에 ‘말뚝’을 박는 것이다.

[아침을 열며]당신은 ‘특별시’민입니까

해방 이후 서울은 각지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의 도시였다. 서울이 ‘특별시’가 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이다. 1963년에는 행정구역 대개편으로 면적이 2배 가까이 확대됐다. 1975년부터 ‘강남 개발’ 등을 거치며 서울은 인구 1000만명의 거대도시가 됐다. 1995년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부산, 대구 등 직할시는 ‘광역시’로 명칭이 바뀌었으나 서울만은 ‘특별시’로 남았다. 일자리, 교육, 문화, 주거, 자산 등 거의 모든 인프라가 서울에 집중됐다. 이런 특별대우는 지금까지 한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너나없이 ‘특별시’에 살려는 것을 탓할 수도 없다. <엄마의 말뚝> 속 어머니가 살고 싶었던 ‘문안’은 요즘으로 치면 ‘강남’쯤 되겠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도 올해 최대 이슈는 부동산이다. 연일 이어지는 물난리도 묻혀 버릴 정도다. 정부가 부동산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서울 집값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집값을 잡기 위해 정부는 잇따른 공급 확대 방안을 내놓았다. 이번 8·4 대책에서는 무주택자와 청년층을 위해 지분적립형 분양주택을 서울에 도입하기로 했다. 지분적립형 분양주택 방식은 입주 시 분양대금의 일부(20~40%)를 먼저 내고 임대 형식으로 장기간 거주하며 남은 지분을 분할 취득하는 것이다. 공공임대주택을 대거 공급해 소유의 필요성을 낮춰 집값을 잡자는 복안이다. 전매제한 기간 등 사업의 성패를 좌우할 것들이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지지는 않았다. 전매제한 기간을 길게 설정하면 시장성이 떨어져 흥행에 실패할 수도 있고, 이를 짧게 두면 투기·특혜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다. 이는 정부와 서울시의 논의가 남았는데, 이번만은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지 말고 정책으로만 접근했으면 한다. 박원순 전 시장 사망으로 구심점을 잃은 서울시가 권한대행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부동산 정책의 목표는 주거안정이다.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사례가 하나 있다. 2011년 다큐멘터리 <프루이트-아이고 신화>로도 제작된 미국 대규모 공공주택 ‘프루이트-아이고’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1954년 미 연방정부의 주택 건설사업의 하나로 세인트루이스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세운 것이다. 하지만 3년 만에 슬럼화가 진행되면서 1972년부터 단계적으로 철거, 폭파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에서 실패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한국에선 부의 상징이 됐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프루이트-아이고는 임대주택이었던 반면, 한국에서 대다수가 열망하는 아파트는 재산 증식의 발판이 됐기 때문이다. 재산을 불리려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문안’에 살고자 하는 욕망과 앞으로도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공포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부알못’(부동산 잘 알지 못한다)인 내가 부동산 정책에 섣불리 훈수를 둘 생각은 없다. 분명한 건 ‘땜질식’ 핀셋 규제나 잦은 정책 변화보다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동산시장 불안 등 여론 악화에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을 비롯해 청와대 수석비서관 5명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일괄 사의를 표시했다고 한다. 청와대 공직자들의 다주택 처분 과정에서 일어난 거센 비판 여론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사퇴 소식에 누리꾼들의 “집값이 더 오를 시그널”이란 조롱이 이어지고 있다. 성난 부동산 민심에 기름을 부은 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다주택 처분을 머뭇거린 일부 고위공직자들이다. 김조원 민정수석은 최근 잠실 아파트를 시세보다 2억원 정도 비싸게 내놨다가 ‘매각 시늉’ 논란이 빚어지자 다시 거둬들였다. 이를 두고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통상 부동산 거래를 할 때 얼마에 팔아달라(고 하는 것을) 남자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투기 의혹을 받았던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도 당시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몰랐다. 아내가 상의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었다”고 했다. 권력을 움켜쥔 남성들의 “몰랐다”며 아내 탓만 하는 비겁한 변명은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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