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에서

2020.09.21 03:00 입력 2020.09.21 03:03 수정

2012년 12월20일 중앙지검에서 근무하던 시절, 공판부장의 백지구형 지시에 반발한 제 이의제기로 부회의가 벌어졌지요. 제 의견인 무죄구형과 백지구형(법원이 법과 원칙에 따라 알아서 판결해 달라) 중 무엇이 옳은지가 논의되었습니다. 허허벌판에 서 있는 듯 외로웠습니다. “백지구형 하라면 하라는 대로는 하겠지만, 검사로서 사건 관계자들 보기 부끄럽다”고 사족을 단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검사들은 백지구형에 적극 동조했으니까요. 상급자 지시 앞에 판단력이 마비되는 현실이 참담했습니다.

임은정 대검찰청 감찰정책연구관

임은정 대검찰청 감찰정책연구관

검찰을 바꾸기 위해, 최소한 유의미한 선례라도 만들기 위해 국가배상소송도 제기하고, 내부제보시스템을 통한 감찰 요청, 국민권익위원회 등에의 민원 제기, 형사 고발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요. 적지 않은 분들이 물었습니다. 검사인 네가 직접 수사하면 되잖아?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 때 윤석열 팀장이 직무 배제되고, 고(故) 윤길중 과거사 재심사건 때 제 직무가 다른 검사에게 이전된 게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닌데, 모르는 척 시치미 떼며 묻는 동료들이 야속했습니다. 형사 입건에서부터 기소까지 상급자 결재를 단계별로 다 받아야 하는데, 전·현직 검찰 고위직을 향한 수사가 쉬이 허락될 리 있겠습니까.

물색 모르는 분들은 “이의제기권을 행사하면 되잖아?”라고 반문을 하겠지만, 2017년 12월에 제정된 ‘검사의 이의제기 절차 등에 관한 지침’은 복종의무 족쇄를 더 조인 악법이라서, 유명무실하다 못해 유해하기까지 합니다. 복종의무 강화에 더하여, 10년간 비공개임을 명시하여 내부게시판을 통한 비판도 사실상 봉쇄하고, 수사를 막은 상급자의 직권남용 공소시효 7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아끼지 않은 규칙이니까요. 그런 악법이 없던 때에 이의제기권을 행사하였다가 쫓겨날 뻔한 제가 다시 선택할 수 없는 수단이지요. 난관을 돌파할 방법이 이제 마땅하지 않습니다.

지휘권과 직무이전·승계권으로 중무장한 상급자의 뜻을 거스르는 수사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검사는 공무상 기밀 등 여러 이유로 비밀유지의무가 있어 침묵할 수밖에 없지요. 직권남용으로 상급자에 대한 감찰을 요구하고 고발해봐야, 검찰이 감찰과 수사를 할 리 없습니다. 선택별 예상 결과를 꼼꼼히 따져본 후 수사검사가 아닌 고발인, 민원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검찰 내부 문제를 공론화해 제도와 관행을 바꿀 수 있고, 재정신청 등을 통해 다투어볼 기회라도 생기니까요. 칼럼도 그런 문제제기 일환이지요.

많이 불편했나 봅니다. 작년 9월, 감찰담당관실 발령을 조건으로 한 인사거래 제안 때, 칼럼 중단, SNS 중단, 고발 취하를 법무부 고위간부로부터 요구받았으니까요. 보안이 필요한 업무라 칼럼과 SNS 중단 요청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고발 취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감찰을 맡기려는 게 아니라 제 이름만 빌리려는 의도가 노골적이잖아요. 개혁에 앞장서야 할 검찰간부들의 면종복배(面從腹背)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여, 앞으로도 검찰개혁이 어렵겠구나 싶은 암담함에 숨이 턱 막혔습니다. 제안을 뿌리치며 결심했지요. 힘들어서 연말까지만 쓰려던 칼럼도 계속하기로.

감찰직을 지망했었습니다. 읍참마속을 해야 하는 고단한 자리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저는 다른 어떤 누구보다 제대로 할 의지가 있다고 자부하니까요. 그런 저이기에 결코 쓰일 리 없다고 체념하고 있던 차, 뜻밖의 인사 발령으로 향후 감찰정책 연구, 감찰부장이 지시하는 사안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고발인이 아니라 감찰정책연구관으로서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라, 법규에 따른 각종 제약과 한계가 예상되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을 감당해 볼 각오입니다.

작년 11월, 저는 “감찰 유감” 칼럼을 통해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 관행을 비판하며 감찰의무 이행을 검찰에 요구한 바 있습니다. 이제 의무 이행을 요구하던 민원인에서 의무 이행을 관철해야 하는 담당자가 되어, 상급자들과의 지난한 씨름을 해야 하고 난관들을 마주할 텐데요. “걷다 보니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제가 좋아하는 <빨강머리 앤>의 한 구절입니다. 모퉁이를 돌면 바위와 비탈도 있겠지만, 여전히 꽃들이 피어있고, 늘 그러했듯 지저귀는 새소리가 청아할 겁니다.

씩씩하게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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