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한 피임의 출발

2020.10.19 03:00 입력 2020.10.19 10:00 수정

대한민국은 낙태를 주제로 제대로 된 토론을 한 적이 없다. 어감부터 둔탁한 ‘낙태’라는 단어에 대해, 사람들은 종교단체의 일방적 해석을 최초 정보로 접한다. 그러니 논쟁한들 방향이 정해진 경우가 많았다. 반대하는 이의 결의는 단호했고 찬성 쪽은 늘 조심스럽게 하고자 하는 말을 우회했다. “부득이한 임신을 한 경우에라도”라는 읍소는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신념보다 무게감이 약했다. 자기운명결정권? 오랫동안 언급되지도 않았다.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낙태와 낙태죄는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낙태에 반대해’라는 개인의 의견 개진을 넘어 ‘낙태하는 자는 살인자다’라며 타인을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공격이 허용되었다. 윤리라는 이름의 포장지로 사람을 낙인하는 걸 서슴지 않으니, ‘낙태죄가 폐지되면 생명경시 풍토가 생긴다’는 일관된 착각이 정설처럼 등장한다. 낙태죄가 폐지되면 여성들이 죄의식 없이 밥 먹듯 아이를 지울 거라는 우려, 나는 이런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은 토론을 본 적이 없다. 차라리 낙태하면 그만이라면서 폭력적인 성관계를 요구하는 남자들이 늘어난다면 따져볼 지점이라도 있는데, 이 사회는 언제나 여자만을 걸고넘어지는 데 익숙하다.

‘태아가 아기인가’에 대한 논쟁을 떠나, 어떤 여성도 태아가 아기가 된다는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여성이 출산을 선택하면 벌어지는 일’에 대한 고민을 없애주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들은 임신을 중지하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고 인생에서 가장 무겁고 참담한 시간을 보낸다. 임신주차가 길어질수록 초조함과 압박감은 심해진다. 원치 않았던 성관계였든, 그렇지 않았든 상관없다.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인지와도 무관하다. 낙태가 죄인들 아닌들 고민의 깊이는 변하지 않는다. 자신과 태아의 운명이 결정되는 갈림길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여성은 없다. 낙태죄가 전면 폐지되었다고 누가 병원을 웃으면서 찾을 리도, 동네방네 알리며 퇴원할 리도 없다. 아무도 해시태그(#)를 달며 SNS에 인증사진을 올리지 않는다. 이게 부끄러움인지, 미안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성 스스로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결정을 내렸고 그에 따른 정당한 감정일 뿐이다.

낙태죄 폐지는 자기 몸의 결정권을 여성 스스로가 지닐 수 있다는 국가의 존중이다. 이는 일상에서 여성들이 더 명확하게 ‘자신’을 결정의 중심에 놓을 수 있는 연료가 된다. “내 몸이니까!”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면, ‘타인의 몸이니까’ 내가 간섭할 수 없다는 사람도 많아진다. 평등한 피임의 출발점이 바로 낙태죄 폐지다. 일각에선 여성이 앞으로 신중해지지 않을 거라고 멋대로 말하는데, 이는 ‘여성이기 이전에 엄마’라는 말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관성일 뿐이다.

낙태를 반대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 기준으로 ‘자기 몸에 대한 선택’이 죄가 되어 사람의 운명이 통제되는 걸 찬성할 자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수술도 거부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자기 몸이다. 너의 몸, 국가의 몸이 아니다. 엄마가 될 몸도 아니다. 자기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온전히 달라질 수 있는 문제다. 그러니 고민할 수밖에 없는데, 선택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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