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단이 막혀 있었다면

2020.10.14 03:00 입력 2020.10.14 03:02 수정

며칠 전 울산의 33층 건물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다행이었다. 누구도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지 않았다. 신속하게 대응한 소방관과 침착하게 대피한 주민들 덕분이었다. 피해복구에 시간이 걸리겠지만 사람들이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면서 문득 다음과 같은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그 건물의 비상계단은 막혀 있지 않았던가?

권지웅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 이사

권지웅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 이사

서울 마포구의 한 아파트는 비상계단이 막혀 있다. 10층과 11층의 계단을 막아선 콘크리트 벽은 분양주택과 임대주택의 동선이 겹치지 않게 하려고 만들어놓은 것이다. 울산의 그 건물도 이렇게 비상계단 어딘가가 막혀 있었다면 어땠을까? 마지막에 구조되었다는 일가족 3명은 33층부터 1층까지 소방관이 업고 내려와 무사했다. 비상계단 어느 한 층이 막혀 있었다면 그들은 지금처럼 건강히 구조될 수 있었을까.

평소에 계단을 쓸 일이 많지 않은 고층 건물에 계단이 막혀 있다는 것쯤은 별일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재난 상황에서 비상계단이 막혀 있다면 올라가야 하는 사람과 내려가야 하는 사람 모두에게 절망적일 것이다. 더구나 비상계단을 막은 조치가 재산의 크기로 사람을 구분 지으려는 의도 아래에서 행해졌다면 그것은 더욱더 비극적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2014년이 생각난다. 많은 사람이 안산에 모였다. 생존자 가족이 유가족을 돌보고, 시신을 찾은 부모가 시신을 찾지 못한 부모에게 미안해하던 때였다. 한 유가족 부모님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맙다. 가난해도 마음껏 여행 갈 수 있는 사회, 과외받지 않아도 꿈을 이룰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역할을 하겠다”라고 했다. 그 부모님은 강남에서 태어난 아이였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죽음도 그 크기를 비교해 우열을 가릴 순 없다. 우리는 재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른 삶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차이가 죽음의 무게, 즉 생명의 무게에 관여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분양주택과 임대주택 사이의 이동을 막고자 한 그 콘크리트 벽에 막혀 누군가가 내려오지 못해 우리 곁을 떠나게 된다면, 그 죽음은 한 생명의 상실만이 아니다. 그 죽음을 낳은 제도와 사회, 그 자체의 상실이다.

누군가의 가족이거나 친구였을 어떤 사람의 상실은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미어진다. 그에 더해 재력의 크기와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그 생명의 무게를 달리 매기는 사회를 마주하게 된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

생명의 공평함은 민주주의 근간이기도 하다. 인간 생명의 무게가 다른 사회에서 모든 시민이 정치적으로 같은 크기의 목소리를 가진다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오늘날 우리는 목숨에서마저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

울산의 화재 사고에서 모두가 살아남았다는 뉴스는 정말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그리 다행스럽지 않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국일고시원 화재로 떠난 사람들, 김용균이라는 사람, 김군이라는 사람, 모두 내가 인정해버린 구조 위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이다. 아직도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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