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을 외면하는 스포츠

2021.06.29 03:00
최희진 스포츠부 차장

출범 원년인 1982년 프로야구의 캐치프레이즈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이었다. 프로야구는 바라던 대로 많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았는데, 프로야구 키움의 외야수 이정후가 그 사례다. 1990년대 스타 야구선수 이종범의 아들이기도 한 이정후는 10세이던 2008년 한국 야구대표팀이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TV로 본 ‘베이징 키즈’다. 그로부터 13년 후 이정후는 그 자신이 도쿄 올림픽 야구대표팀에 발탁될 만큼 재능과 실력을 갖춘 야구선수로 성장했다.

최희진 스포츠부 차장

최희진 스포츠부 차장

이정후의 재능을 하나 더 꼽자면, 그는 입만 열면 바른말만 하는 뛰어난 언변의 소유자다. 이정후는 올림픽 대표팀에 선정된 후 “우리도 국제대회에 나갔던 선배님들을 보면서 야구를 시작했다. 요즘 어린이들이 야구를 잘 안 본다고 하더라. 우리가 이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서 우리를 보고 야구를 시작하는 어린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후는 자신이 누군가의 꿈과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런 영향력이 프로야구 저변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영리한 청년이다.

어린이들이 꿈과 희망을 키우는 사이, 어른들은 잊고 살았던 열정의 기억을 되살린다. 프로야구 원년에 태어난 SSG 외야수 김강민은 지난 22일 LG전에서 팀의 마지막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김원형 SSG 감독은 경기가 1-13으로 크게 기울자 팬 서비스 차원에서 김강민을 투수로 기용하는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김강민은 2001년 입단 이래 야수로만 20년을 뛰었지만 마음 한편엔 투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철저히 관리해 마흔 살까지 프로에서 살아남았고, 이루지 못하리라 여겼던 꿈을 갑자기 이뤘다. 김강민은 “너무 흥분해 집에 가서 잠을 잘 못 잤다. 좋은 추억이고 못 잊을 하루였다”고 했다. ‘투수 김강민’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던 관중석의 어른들도 그 못지않은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모든 프로스포츠가 이런 미담을 생산하는 건 아니다. 최근 프로배구에선 지난 2월 학교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이재영·다영 자매의 복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소속팀 흥국생명은 당시 자매에게 무기한 출장정지 징계를 내리면서 자매의 사과와 폭력 피해자의 회복이 복귀의 필요조건인 것처럼 설명했다. 그러나 4개월 사이 기류가 완전히 바뀌었다. 자매는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온라인에 게시한 사과문도 삭제했다.

사과도, 회복도 없었지만 구단은 두 선수의 복귀를 추진하고 있다. 4개월 전에는 사과와 반성을 강조하던 구단이 태도를 바꿔 선수 살리기에 나섰다. 젊은 선수들을 이대로 매장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해 혐의를 벗지 못했다. 구단은 너무 빨리 안면을 바꾼 반면, 여론은 자매를 다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난 2월 쌍둥이 자매에서 시작된 학교폭력 폭로 릴레이는 다른 스포츠 종목과 연예계로 번져나갈 만큼 파장이 컸다. 당시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사과문부터 썼던 구단이 어물쩍 선수 복귀를 밀어붙이려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프로스포츠의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흥국생명의 행태에서 어린이들이 꿈과 희망, 감동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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