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녹아내리고

2021.07.03 03:00 입력 2021.07.03 03:01 수정
김지연 전시기획자·d/p 디렉터

홍진훤, melting icecream, 2021, 단채널비디오, 4채널 사운드, 60분 반복재생 ⓒ홍진훤

홍진훤, melting icecream, 2021, 단채널비디오, 4채널 사운드, 60분 반복재생 ⓒ홍진훤

기념하는 자는 분주하다. 그가 영민하게 붙잡은 기념의 명분은, 엉성하지만 끈질기게 쳐놓은 기억과 기록의 네트에 힘입어 허공에서 출렁인다. 그물 짜기에 지친 메마른 자들이 어설픈 네트 사이로 힘없이 떨어지면, 여기 걸터앉은 기름진 야망은 변주된 명분의 그물을 엮어나갈 터. 네트는 넓어지는 만큼 무거워지겠지만, 결단코 바닥에 닿을 수는 없다. 네트는 구조하지 않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수해를 입은 필름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홍진훤은 녹아내린 필름을 복원하고, 그 과정을 기록하기로 한다. ‘민족사진연구회’가 30년 전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찍은 A컷 필름 북으로 추정되는 이 기록물은, 당시의 현장, 기록자의 시선, 현재의 쓸모를 재단하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그 주역들이 신화화되는 시간을 지켜봐 온 작가의 마음은 그가 복원하려는 세계의 시각 이미지를 향한 의심에 도착한다. “이 시각세계의 복원은 무엇을 삭제하는가.” 민중언론 ‘참세상’이 카피레프트로 공유해 온 비정규직, 이주민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 아카이브 영상을 떠올린 그는, 80년대 후반의 민주화운동과 2000년대 초반의 비정규직 투쟁, 현재의 풍경까지 세 개의 시간 축에,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공고해진 세계와, 그 세계의 출현을 막기 위해 싸웠던 이들, 그 사이에서 역사의 주역이 되기로 한 자들의 그림자를 엮었다. 선명한 이미지와 녹아내린 장면이 기억을 돌아보는 자들의 목소리와 얽혀 서걱거린다.

작품이 전하는 역사적 과오 앞에 불편해지는 자, 불편을 넘어 반성할 수 있을까. 녹아내릴지라도 여전히 달콤한 힘을 놓지 못하는 이를 두고, “아직 승리를 선언하지는 말라”는 약자들의 목소리가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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