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넛과 건축의 공백

2021.11.11 03:00 입력 2021.11.11 03:05 수정

[조진만의 도발하는 건축] 도넛과 건축의 공백

우리말 중에는 ‘멋’이라는, 외국어로는 정확히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가 있다. 멋이란 기능과는 별개로 필요 이상의 넉넉함을 바탕으로 발휘되는 세련됨을 통합적으로 아우르는 말이다. 한국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고 김수근 선생은 “멋이라 함은 바로 이 여유로움, 즉 넉넉함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런 ‘멋’이 한국의 전통건축에서 대청이나 누마루, 그리고 사랑방이 가지는 공간적 특징에서 잘 나타난다”고 했다. 대청이라는 넓은 마루방은 낮에는 창호지 문을 전부 걷으면 확 트여 외부에 가까운 공간이고, 밤에는 다시 잠그면 내부가 되는 중간적인 공간이다. 우리의 전통건축은 기능을 위해 그 속에 있는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공간 내에서 다양한 해프닝과 놀이가 이루어지도록 하여 기능적인 것과는 다른 창조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다.

조진만 건축가

조진만 건축가

서울 근교 삼대 일가족의 보금자리인 ‘벽의 집(사진)’은 이러한 생각을 담아 만들어졌다. 급경사의 땅은 안쪽으로 울창한 숲을 껴안고 앞쪽으로 멀리 펼쳐진 풍경을 지니고 있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마주한 자연과 풍경을 어떻게 하면 멋스럽게 집 속 깊숙이 그리고 넉넉히 담을지가 관건이었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수평의 바닥과 수직의 벽을 기본으로 이루어진다. 수평의 바닥은 서로를 연결하고 수직의 벽체는 각각의 공간을 구분한다. 이 집은 구분의 수직 요소인 벽이 여러 켜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벽들은 경계로서 역할이 아닌 확장하고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다중의 벽들은 서로 미묘하게 어긋나고 높낮이를 달리하면서 주변의 자연을 담는 캔버스와도 같다. 집의 주요 구조체 역할로 방들을 만들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넉넉하게 뻗어나가 창을 열면 대청과 같이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진다. 경사지라 자연스레 맨 아래층은 안쪽 숲을 감싸 안고 위층들은 열린 하늘과 풍경을 차경으로 끌어온다. 도넛 중앙의 구멍을 공백인지 존재인지로 받아들일지는 맛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어느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집에서 기능을 넘어선 벽들 사이의 공백은 명확한 존재이며 그 속의 삶을 맛나게 한다.

집은 작지만 하나의 소우주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함께 또 따로, 느슨하지만 다양한 외부와의 관계를 조직하는 여백의 공간은 그 속에서 우리가 사유하며 삶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한다. 좋은 건축이란 기능들로 빼곡히 채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제공하고 그 속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창조적으로 채워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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