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힘들게 일할 자유 주겠다?

2021.12.20 03:00 입력 2021.12.20 03:01 수정

202×년, 대한민국 최저임금 패러다임이 교체된다. 최저라 할지라도 삶의 존엄성이 무너져선 안 된다는 헌법정신은, “150만원으로도 일하겠다는 걸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하냐”는 대통령의 선거 전 주장으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도입된 건, 더 힘들게 살 자유를 보장한다는 ‘최저임금 최저가 경쟁입찰’이었으니 풍경 몇 조각을 보자.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이른 새벽, 인력사무소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오늘만이라도 일용직 노동자가 되길 희망하는 이들이다. 잠시 후 건설현장의 관리자라는 사람이 방문하여 단순직 희망자를 찾는다며 말한다. “자, 최저임금 9160원부터 시작하죠. 네, 9100원 나왔네요. 아, 8500원 손 드셨습니다. 이제 없습니까? 하나, 둘, 아! 7900원? 어? 6900원 나왔습니다. 대박입니다. 마감합니다! 낙찰자는 봉고차에 타세요.”

청년 아무개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찾고자 구인 앱을 살펴본다. 원하는 지역과 근무시간대를 입력하는 칸에는 ‘희망 최저임금’이라는 예전에 없던 항목이 생겼다. 고민이다. 최저임금 받고 일하다가 그보다 적게 받겠다는 구직자들이 많아 몇 개월 만에 그만두지 않았던가. 법 따지다가는 하는 일도 불안정하고, 일을 구하는 것도 불확실하다는 걸 경험했다. 그래서 급여는 낮더라도 고용될 수 있는 높은 확률에 베팅한다. 최저임금보다 1000원 낮게 입력하니, ‘확정 후 시급 인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주의가 팝업창으로 뜬다. 동의버튼을 누르니, ‘경쟁입찰 마감 후 개별통보’한다는 안내가 이어진다. 하지만 아무개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고 하겠다. 수요와 공급 법칙도 모르냐면서 윽박지르겠다. 인간의 합리적 선택으로 인해 나쁜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될 거라면서 빈정거리겠다. 하지만 어떤 위치에서의 합리성은 일반적 눈높이와 다르다. 돈이 필요한 상황, 그래서 찬밥 더운밥 고민은 차치하는 게 일상이 된 세계에선 ‘묻고 더블로’ 더 아래로 가도 버티겠다는 사람이 존재한다.

<진격의 대학교>라는 책에 소개한 사례다. 부실대학 명단에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던 지방 ○○대에서 강의할 때다. 교내 편의점에서 ‘최저임금 준수’라면서 구인광고를 하는 걸 보고 당연한 걸 대단한 것처럼 표기한 게 의아하다고 하니, 학생 한 명이 퉁명스럽게 말한다. “선생님! 이 동네에서는 최저임금 잘 안 줘요.” 충격에, 조사를 해보니 명문대라는 곳에 비해 최저임금이 지켜지지 않는 비율이 2배 이상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리되었을 거다. 사정상 좀 이해해달라는 부탁을 했을 거고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을 거다. 반복되다 보면, ‘이런 대학 다니면서 권리 어쩌고 하면 사회생활 못한다는 소릴 들어’라는 훈계가 부유한다. 그 공간에선 불평등을 인정하는 게 긍정적인 자세다. 버티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 경험을 본인의 고군분투 서사를 적절하게 증명하는 강력한 연료로 사용한다. 그렇게, 사회는 나빠진다.

자유는, 최저임금보다 낮게 받아도 일하겠다는 사람을 설명할 때 적용될 단어가 아니다. 최저임금은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한 마지노선이다. 노동자의 생산성 향상은 생활의 안정으로 가능하고, 이는 푹 자고 잘 먹고 여행도 하고 사랑도 하는 게 ‘최저의 삶’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 달에 150만원으로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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