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성 균형 이론

2022.01.11 03:00 입력 2022.01.11 03:04 수정

“우리는 이제 감염병 교과서를 덮을 수 있다.” 약 60년 전, 미국 의무총감 윌리엄 스튜어트의 말이다. 20세기 중반, 의학계는 인류가 감염병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에 젖어 있었다. 심지어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면역학자 맥팔레인 버넷은 ‘미생물에 관한 기초 의학 연구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유는 두 가지. 의학은 충분히 발전했고, 감염병은 자연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만의 시대였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잠깐, 의학 발전은 그렇다고 치자. 감염병이 자연적으로 감소할 운명이라고? 1937년, 호주 정부는 야생 토끼를 박멸하기 위해서 점액종 바이러스를 일부러 퍼트렸다. 개체 수가 불어난 토끼로 인해 전 국토가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무려 99.8%의 치명률을 보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바이러스의 독성은 점점 약화되고, 토끼는 점점 튼튼해졌다. 토끼는 다시 늘어났다.

이른바 ‘병독성 감소의 법칙’이다. 1934년, 테오발트 스미스가 제안했다. 한때 미국 최고의 세균학자로 불렸던 인물이다. 세대를 거듭하면 병원체와 숙주의 안정적 균형이 나타나고, 병독성은 점점 약해진다는 것이다. 직관적이고 명쾌하다. 사실 병원체에게 숙주를 괴롭힐 의도 같은 건 없다. 숙주가 죽으면 자기도 같이 죽는다. 사람들은 병원성 균형 이론의 메시지를 참 좋아했다. 적대적인 두 종이 결국 평화로운 공생의 길을 찾는다니! 유전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는 ‘숙주와 병원체의 기생적 관계는 진화적으로 불안정하므로, 결국 협력과 공생으로 대체된다’고 했고, 진화학자 에른스트 마이어도 ‘숙주와 기생체 사이엔 반드시 완벽한 균형이 유지돼야 한다’고 했다. 경험적 증거가 부족했지만, 비병원성 가설은 진화의 오랜 철칙처럼 받아들여졌다.

원래 병원성 균형 혹은 비병독성 가설의 초기 모델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76년, 상리공생이라는 개념을 제안한 벨기에의 동물학자 피에르-요제프 반 베네덴이 주인공이다. 그는 다윈주의에 반대한 특별 창조론자였다. 생명체의 평화로운 공생이 신의 자비로운 섭리이며, 태초부터 계획된 일이라고 했다. 뭐, 진화든 창조든 모르겠다. 아무튼, 협력과 공생이라지 않는가? 그렇게 되면 좋겠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우리는 아직도 감염병에 시달리는가? 교과서를 덮기는커녕, 책은 점점 더 두꺼워지고 있다.

수리생물학자 로버트 메이에 따르면, 숙주 사망에 따른 기생체의 손해는 다른 이득으로 상쇄될 수 있다. 감염속도가 빠르거나 숙주 집단의 크기가 크면, 고병원성으로 인한 손해가 상계된다. 게다가 숙주에게 호의적인 병원체는 제 잇속만 차리는 병원체와의 종 내 경쟁에서 패배한다. 그뿐 아니다. 무증상 감염 기간이 길면, 역설적으로 고병원성이 진화할 수 있다. 앞서 말한 토끼 점액종 사례는 병원성 균형 이론의 근거로 종종 제시되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병독성은 그리 많이 감소하지 않았다. 호주 토끼에게 벌어진 일에 관해서는 일곱 가지 대안적 설명이 가능하다. 잘 모른다는 얘기다.

우리는 긴 진화 과정의 순간적인 스냅숏만 볼 뿐이다. 코로나19는 겨우 두 살이다. 미래를 예단하지 말자. 공생적 진화라는 시나리오는 참 희망차게 들리지만, 여러 조건이 ‘이상적’일 때만 가능하다. 설령 그렇다 쳐도 그 ‘균형’을 찾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가늠조차 어렵다. 결핵균은 최소 1만년 전부터 인류에게 질병을 일으키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매년 150만명이 결핵으로 사망한다. 도대체 언제 평화로운 공생을 시작한다는 말인가? 그나마 우리가 결핵에서 이 정도라도 자유로워진 것은 불과 100년도 안 된 일이다. 95% 이상의 영아에게 시행하는 BCG 예방 접종, 그리고 대규모 결핵 선별 검사 덕분이다. 코로나19도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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