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설 풍경과 우리의 일상

음력 정월 초하루, 오늘은 설날이다. 이곳 가야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해인사의 대중 스님들도 새해 첫날은 설레고 분주하다. 옛 현자가 남긴 “山中無日歷 寒盡不知年(산중무일력 한진부지년) ; 깊은 산속이라 달력이 없으니, 한겨울이 다 지나도 해가는 줄 모르겠네”[출처; 당시선집(唐詩選集)]라는 글귀도 있지만, 설은 설이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설 전날까지만 해도 봄날처럼 햇살이 비추더니, 새벽녘부터는 어느새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문을 나서자니 댓돌에 벗어놓은 고무 털신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세상이 온통 하얗다. 서설(瑞雪), 상서로운 눈이다. 예전에 노스님으로부터 설날에 눈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흡사 전장의 말발굽 소리 같은 법고 소리가 새벽 여명을 가르며 가야산을 깨운다. 이곳저곳 전각에서 나온 스님들이 마스크를 낀 채, 하나둘씩 가사를 휘날리며 대적광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새벽 예불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설날에는 예불이 끝나도 스님들이 곧바로 자리를 뜨지 않는다. 이내 아직 동자승 티를 벗지 못한 어린 사미가 “통알이요”하고 크고 앳된 소리로 외친다. 이 소리를 신호로 법당에 모인 모든 스님들은 일제히 부처님과 불보살님께 세배를 올리게 된다. 이 세배를 절집에서는 ‘통알(通謁)’이라고 한다.

그 후에는, 어른 스님들께 드리는 세배인 ‘세알(歲謁)’이 이어진다. 이때는 가야산에 흩어져 있는 암자들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대중 스님들은 방장 큰스님께 세배하는 것을 시작으로 앉는 순서에 따라 어른 스님들께 차례대로 세배를 드린다. 매년 하는 세배지만 더러는 새로운 얼굴들이 섞여 있고, 더러는 다른 절로 옮겨가서 보이지 않는 스님들도 있다.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 같은 산중이지만 그래도 그런 듯 안 그런 듯 변화는 있다. 세배가 끝나면 따뜻한 대방으로 자리를 옮겨, 방장 큰스님께서 새해 덕담을 해 주신다. 그러고 나서는 산중의 어른 스님들은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행자, 재가불자님들 모두에게 세뱃돈을 나눠준다. 매우 약소한 금액이지만 분위기 덕일까 항상 그 순간만큼은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다. 아마도 기쁨과 행복, 기대와 희망을 나누는 자리여서 그 기운이 배가 되는 것 같다. 이후에는 스님들이 삼삼오오 암자들을 돌며 세배를 하는데 오후 나절까지 계속된다.

이것이 산사에서 벌어지는 설날의 정경이다. 모든 과정이 일부는 의례로서, 일부는 관례로서 진행된다. 산에 살다 보면 일상이 매우 지루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반복되는 일과와 행사이지만 그 속에도 차이가 있어서 매번 새로움을 느낀다. 어쩌면 잡사가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아서 더욱 민감하게 그 차이를 포착해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산문을 연 지 천 이백 이십 해를 넘어선 해인사는 천 이백 이십 번째의 설날을 또 맞이한다. 같은 장소에서 스님들만 바뀌었을 뿐, 설날의 일상은 이렇게 펼쳐지고 반복된다. 아마도 전란이 있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매년 그러했을 것이다. 굳이 차이점을 들자면, 오늘처럼 더러는 눈이 내렸거나 아니면 몹시 춥거나 따뜻하거나 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오미크론 바이러스 유행이 심해지면서 노스님들께서 계신 곳에는 세배마저도 삼가게 된다. 혹시나 누를 끼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산속 깊숙한 절집에서도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은 일상마저 바꾸어가고 있다.

늘 익숙하게 지내왔던 설을 맞이하지 못하기는 산문 안이나 밖이나 다름없다. 어색했던 마스크 착용이 적응되어버린 요즘에는 설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고 가족을 만나 차례를 지내는 일상이 오히려 특별하게 다가온다. 이전에 누가 마스크를 끼고 어른들께 세배하는 광경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스크를 쓴 채로 나누는 눈인사와 세배지만, 서로에게 일상을 잘 지탱해내고 있다는 혹은 잘 살아내고 있다는 격려이자 응원이다. 너무나 뻔하게 반복되는 교통체증이나 만남이 부담되는 귀향길일지라도 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일상은 귀하고 소중하다. 이제 우리는 이전의 일상을 보낸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뿐더러, 일상을 지켜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우리에게 일상이란, 심지어 달력도 필요 없고, 이 겨울이 다 지나도록 해가 바뀌는 줄조차 모를 정도로 단조롭고 지루하더라도 그 자체로 행복이다. 부디 내년 설에는 모두가 마스크를 벗고 서로의 환한 미소를 마주하면서 세배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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