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보다 자격증

2022.06.03 03:00 입력 2022.06.03 03:01 수정

예상대로 대학은 자신이 준 학위가 표절인지 아닌지 여전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는 세상 다 그런 거지 뭘 그리 까탈스럽게 구냐고 배짱부린다. 어쩌다 운 없이 일찍 표절이 들통난 이는 왜 나만 갖고 그러냐며 학위 반납을 선언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천연덕스럽다. 이쯤 되면 도대체 왜 석·박사 학위를 따야 하는지 근본적인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도 대학은 온갖 석·박사 학위 과정을 만들어 수강생 모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려는 듯 ‘온 나라 학위 따기’가 성행한다. 도대체 왜 이 모양일까?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에 대한 답을 준다. 무엇보다도 대학이 자율적인 학문 영역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율적인 영역은 기능이 분화하고 전문화된다고 해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초월적 신, 즉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우선 혈족주의 같은 주술에 묶여 있는 가치를 풀어서 보다 초월적인 언어로 합리화해야 한다. 이 작업에 헌신하는 엘리트 집단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학문 영역의 초월적 신은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진리’다. 평생 진리 추구에 온몸을 던지는 학자 집단이 있어야만 학문 영역은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다.

현실은 처참하다. 그동안 생존 경쟁에 내몰린 대학이 권력과 돈을 구걸하는 사이 진리 추구의 가치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학자를 연구비 따오거나 신입생 끌어오는 영업직원 취급한다. 이런 풍토에서는 진리 추구를 통해 구원받으려는 학자 집단이 형성될 수가 없고 당연히 학문 영역의 자율성이 생길 리 없다. 외국 학문장을 기웃거리지만, 정작 임금은 국내 학생에서 나오는 씁쓸한 아이러니! 짜깁기하고, 베끼고, 표절해도 별 상관하지 않고 학위를 남발한다. 학생은 공부를 만만하게 보고 학위를 채집한다.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나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다.

고용 시장에 시그널 이론을 도입한 경제학자 스펜스는 이러한 기대가 쓸모없다는 걸 알려준다. 고용주는 고용 당시 구직자 개인의 생산적 능력을 확신하지 못한다. 이는 고용 결정을 불확실성의 세계로 빠트린다. 불완전한 정보와 불확실성 속에서 고용주는 업무에 대한 기대와 믿음에 따라 임금 수준을 정해 공지한다. 대부분 구직자는 자신의 능력보다 낮은 임금 수준 업무에는 지원하지 않는다. 결국 주어진 임금 수준에는 항상 능력이 떨어지는 지원자가 몰린다. 그런데도 지원자는 자신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시그널를 주기 위해 자신의 속성을 어느 정도 조정한다. 조정하려면 비용이 드는데, 교육이 대표적인 예다. 너무 많이 투자하면 온갖 기회비용을 날릴 수 있다. 즉각 성과를 내는 교육에 투자하는 게 리스크가 작다. 비교적 쉽게 딸 수 있는 학위가 딱 맞다.

스펜스의 시그널 이론은 열악한 노동시장이 즐비한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펜스는 구직자가 보내는 시그널이 생산적 능력과 역(逆)의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정(正)의 상관관계가 있다면, 굳이 비용이 드는 시그널을 보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구직자가 학위증을 흔들며 능력 있다는 시그널을 보내도 고용주는 믿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 책정한 임금 수준만 붙든다. 열악한 노동시장에서는 가격경쟁을 통해 최대한 이윤을 뽑아내는 것이 목적이어서 애초에 구직자의 생산적 능력에 대한 기대가 낮다. 결국 능력이 떨어지는 구직자가 저임금으로 고용되어 낮은 생산성으로 일한다. 고용주의 기대와 믿음이 옳았다는 듯 실현된다. 이것도 모르고 구직자는 오늘도 학위 따기에 열중한다. 하지만 곧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챈다. 그러자 대학이 학위보다 자격증을 내건다. 졸업 후 취업을 보장한다는 갖가지 자격증을 만들고 이에 맞춰 교과과정을 개편한다. 공부가 시그널링 비용으로 추락하는 사이 학문 영역의 자율성이 완전히 쪼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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