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모습이 내 얼굴에 비친다

2022.09.08 03:00 입력 2022.09.08 03:02 수정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 부모 모습이 내 얼굴에 비친다

두어달 전 초여름 삼촌 문상 갔을 때 일이다. 먼저 와 계시던 이모가 내가 가까이 오길 기다려 대뜸 “형부가 들어오시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운을 떼었다. 나도 외할머니를 소환하며 가볍게 응수했지만 나이 들어가는 처남이나 처고모 얼굴에서 장인어른의 모습을 찾아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아마 이런 경험은 내 또래에 접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으리라. 스스로는 잘 느끼지 못하나 가족 이력을 잘 아는 사람의 인식 체계에 쉽사리 포착되는 이런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일까?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2018년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영장류 친족 선택을 연구하는 카젬 박사는 ‘나이가 들수록 부모 자식의 얼굴이 닮아가는 경향이 높다’는 논문을 영국왕립학회지에 실었다. 사람이 붉은털원숭이 사진을 보고 부모 자식을 짝짓는 실험이었다. 동물원에서 약 25년을 사는 원숭이 새끼의 경우 나이가 두 살 정도는 되어야 사람 평가자들은 원숭이 부모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찾아냈다. 나이가 들면서 그 정확도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갓 태어난 원숭이 얼굴에서는 부모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듯했다. 실패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부모나 친척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자신의 유전자를 절반 소유한 자손에게만 오롯이 부모의 자원을 투자하는 일이다. 또 하나는 근친 교배를 피하려는 진화적 경향성이다. 사촌들처럼 유전체를 일부 공유한 집단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려서 함께 자라난 또래들끼리 부부의 인연을 맺는 경우가 드물다는 이스라엘 키부츠 공동체 연구 결과도 발표된 적이 있다. 부모와 자식, 사촌들끼리 서로 닮는 현상은 이른바 ‘표현형 수렴’이라는 생물학적 근거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어린 원숭이의 얼굴에서 부모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진화학자들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를 가진 가정에서 태어난 새끼라면 얼굴에 드러날지도 모를 자신의 유전적 신호를 숨기는 일이 생존에 절대적이었으리라는 가설을 펼친다. 태반 주인인 모계는 혼동될 염려가 거의 없는 반면 부계는 언제든 부정이 끼어들 수 있었던 인류의 생물학적 과거가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다. 이 가설이 옳다면, 다시 말해 아이가 커서 독립성을 키운 뒤라면, 닮거나 닮지 않은 얼굴이 초래할 이해관계가 줄 테고 본 모습을 떳떳이 드러내고 살 수 있다.

하지만 붉은털원숭이 관찰 결과를 토대로 인간의 습성을 바로 해석하는 일은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카젬 연구진은 원숭이와 인간의 면역계 세포를 조사하고 비슷한 생물학적 나이대에 두 개체의 단백질 구성이 흡사함을 밝혔다. 게다가 인류는 혈액의 단백질 분포를 분석하여 나이를 정확하게 추정하는 과학적 수준에 이미 도달했다. 50대 후반인 현재 내 혈액 속 단백질은 어렸을 때와 사뭇 다르다. 같은 사람에다 동일한 유전체를 가졌음에도 그렇다.

시간의 힘도 무척 중요하다. 함께 보낸 시간이 긴 부부들이 서로 닮는 현상은 흔히 볼 수 있다. 비슷한 환경에 적응하는 동안 부부의 후성 유전학적 지표는 남보다 훨씬 비슷해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같은 음식을 소화하느라 서로 닮아가는 장내 세균의 유전체가 빚어내는 형상도 부부 사이에 비슷해질 수 있는 것이다.

원숭이뿐만 아니라 인간 집단에서도 아기가 엄마보다 아빠를 더 닮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 아이를 두고 세 후보 아버지의 사진이 등장한 ‘네이처’ 논문 설문지에서 나도 아버지를 맞혔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진화와 인간 행동>에서 유럽 연구팀은 아이들이 엄마와 아빠를 비슷한 비율로 닮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더 많은 사진을 분석하고 인공지능까지 동원한 최근 결과를 보면 우리는 비슷한 정도로 부모를 닮는다. 다행이다.

며칠 전 사진을 찍고 보니 내 얼굴에 언뜻 어머니 모습이 비쳤다. 여태껏 내 얼굴에서 부모 모습을 ‘감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움 같은 감정이 유전자를 소환해서 뭔가 일을 꾸밀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나이 먹어가는 내 얼굴에서 부모 모습이 비치는 일의 진화적 이점을 찾지 못하겠다. 그러나 목소리는 들린다. 내 안에 든 부모 유전자 반쪽이 자신의 형상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한 세대에 걸쳐 쏟아부었던 ‘내리사랑’을 잊지 말라고 속삭이는 듯싶다. 태풍 끝물에 걸친 커다란 달이 환하고 추석이 다가온다. 수십억년 전에도 수억년 전에도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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