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변화를 따라잡기

2023.03.27 03:00 입력 2023.03.27 03:05 수정

최근 조지 오웰의 <1984>를 다시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중·고생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정해준 필독서 중 하나였는데, 별로 재미는 없었던 것 같다. 줄거리도 모두 까먹고, 책을 안 읽은 사람도 다 아는 빅브러더 정도만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독서는 좀 달랐다. 텔레스크린과 마이크로폰 같은, 소설 속 디스토피아의 첨단 감시 기술이 모두 현실화되었다는 깨달음 때문은 아니었다. 이 정도에 놀랄 만큼 심약한 사람은 아니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집행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최근 이 책을 읽고 가슴이 두근거린 것은,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에서조차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신어(新語) 제조 공정을 이 코너 제목처럼‘지금, 여기’에서 실시간으로 내가 목격하고 있다는 비현실적인 현실 자각 때문이었다.

전체주의 국가조차도 감시와 폭력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다. 민중들의 자발적 예속을 이끌어내고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말’이 필요하다. 그래서 ‘진리부’ 소속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종일 과거 신문 기사와 책을 뒤지며 당이 원하는 과거를 창작하고 개작한다. 예컨대 수년 동안 당은 유라시아와 전쟁 중이라며 시민들을 닦달했지만, 승전의 결의를 다지는 군중 행사에서 느닷없이 유라시아는 우리 동맹군이라고 발표해버린다.

구차한 해명도 없다. 진리부 소속 노동자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사무실로 돌아가 며칠간 밤샘 작업을 하며 과거를 꼼꼼하게 편집한다. 이제 유라시아와의 전쟁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문장은 이 세계에서 그저 문학적 메타포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공정은 어두운 작업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빅브러더의 통제하에 이루어졌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돌아가는 법 아닌가. 가상 세계로 갈 것도 없이, 과거 국가정보원조차 댓글부대는 음지에서 활동하도록 했다. 그러나 세상이 달라졌다. 자유민주주의 세상이 도래하면서, 우리는 과거를 편집하고 신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투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건폭’이라는 신어를 사용하자, 이는 마치 단군 이래 쓰여왔던 낱말인 것처럼 아무런 의문도 설명도 없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빅카인즈에서 2022년 신문기사를 검색해보면, ‘건폭’이라는 키워드의 기사는 한 건도 나오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진리부가 열심히 일하지 않은 탓이다. 그뿐이랴. 고용노동부 장관은 전문가, 노동자 대다수가 반대하는 근로시간 개편안을 두고 노사의 ‘시간 주권’을 돌려주는 역사적 진일보라고 소개했다. 개편의 지향점은 근로자의 선택권, 건강권, 휴식권의 보편적 보장이란다. 내가 알고 있던 단어들의 뜻이, 바로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바뀌었다. 놀라운 기술이다. 한편으로는 노조를 사회악 취급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근로시간 개편을 위해 근로자 대표를 제도화하겠다고 큰소리친다. 혼란스러운가? <1984> 가상국가의 ‘이중사고’를 활용하면 문제없다. 그곳에서 ‘흑백’이라는 낱말은 반대편에게 쓰일 때는 명백한 사실임에도 흑을 백이라고 우겨대는 ‘기만’을 나타내지만, 우리 편에게 적용할 때는 (당의 요구에 따라) 흑을 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충성심’을 뜻한다. 모순 따위는 없다. 이것이 바로 이중사고의 마법 같은 힘이다.

쏟아져나오는 신어를 쫓아가고 과거에 대한 지식을 업데이트하느라 숨이 가쁘다. 한일합병조약은 법률상 유효한 것이었고, 일본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이미 수차례 했으며, 후쿠시마에서의 방사능 누출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 내일은 또 어떤 새로운 낱말과 새로운 역사를 익히게 될까? 학구열에 불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시민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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