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의 가치를 물어야 할 시간

2023.06.24 03:00 입력 2023.06.24 03:01 수정

‘킬러 문항’이 공개되면 누구나 분노에 치를 떨게 될 것 같다. 며칠 전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이사장이 “변호사도 풀지 못하는 문제”라면서 공개한 내용을 보고 나도 그랬다. “갑 은행이 어느 해 말에 발표한 자기자본 및 위험가중자산은 아래 표와 같다. 갑 은행은 OECD 국가의 국채와 회사채만을 자산으로 보유했으며 바젤Ⅱ협약의 표준 모형에 따라 BIS 비율을 산출하여 공시하였다. 이때 회사채에 반영된 위험 가중치는 50%이다. 그 이외의 자본 및 자산은 모두 무시한다.” 이런 설명과 수치를 제시하고 ‘갑 은행이 보유 중인 회사채의 위험 가중치가 20%였다면 BIS 비율은 공시된 비율보다 높았겠군’ 등의 5개 보기를 주면서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라는 2020년 수능 국어 문제였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한윤정 전환연구자

이런 문제를 대입 수험생이 풀어야 하는 현실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킬러’라는 말 그대로 아이들을 죽이는 일이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골병들고 사교육은 존속한다. 문제가 어려워져도 아이들은 죽기 살기로 따라가야 한다는 점에서, 수사나 감사로 밝혀질지 모르겠지만, 교육당국과 사교육업계의 ‘카르텔’이라는 점도 확실하다. 제5공화국의 업적인 사교육 금지가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수십년간 누적된 현상이고 변화가 절실하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수능 난도를 낮추고 학원의 불공정 행위를 단속하고 사교육이 필요 없도록 공교육을 강화한다는데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진짜 생각하는 걸까? 문제가 쉬우면 변별력이 떨어지는 ‘물수능’이 되거나 ‘킬러’ 대신 ‘준킬러’ 문항이 늘어나서 학원 수요는 여전하다는 등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다. 공교육이 어떻게 사교육을 대체할 것이며 나아가 왜 그래야 하냐는 것이다. 공교육이 국·영·수·사·과 학습 위주로 이뤄지는 한 사교육을 대체하기 어렵다. 학원은 집요하게 따라잡으면서 아이들을 문제 푸는 기계로 만들어준다. 학원을 핍박해서 다 없애면 되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공교육은 사교육과 달라야 하며 공교육의 가치에 따라 입시제도가 만들어지는 게 이상적이다.

윤석열 정부만 탓할 바도 아니다. ‘조국 사태’를 봉합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대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시 학교생활기록부 전형 위주로 가던 입시제도를 되돌려 서울 시내 대학들의 정시 비중을 40%로 높이도록 했다. 수능 비중이 높아지면 난이도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교육과 입시 문제는 난제 중 난제이지만 어느 쪽이든 정치적 이익에 따라 접근하다 보니 문제를 더욱 키우는 것이다. 난데없는 수능 이슈를 놓고 다시 편 가르기를 하기보다는 공교육의 가치가 무엇인지 물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교육은 가정과 더불어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도록 키우며 그 아이들을 통해 국가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과업을 부여받았다고 믿는다. 부모의 능력에 따라 아이들 처지가 크게 달라지지 않도록 보완하는 것이 공교육이 지향해야 하는 공정이다. 이는 학원에 가지 않고도 시험을 잘 봐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포함하지만, 학원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교육해야 할지에 대한 공통감각이 필요할 텐데 지금 우리 사회가 극단적 대립상태이니 교육현장마저 미래의 유권자를 확보하려는 정치투쟁의 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 사례가 최근 생태전환교육을 둘러싼 갈등이다. 서울시의회 최유희 의원을 비롯한 국민의힘 소속 시의원 53명은 서울시교육청이 2020년부터 추진해온 생태전환교육을 무력화하기 위해 ‘생태전환교육 지원 및 활성화에 관한 조례’를 폐지하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서울 학생들의 농촌유학 프로그램의 문제점을 들지만 본질은 ‘생태전환교육’을 ‘환경교육’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환경교육을 생태전환교육으로 확대할 당시, 기후위기와 지속 불가능한 미래를 극복하는 사고와 삶의 전환이라는 문제의식을 희석시키려는 움직임이다.

기후생태위기는 진보적 의제라기보다는 보편적 의제이다. 나날이 격변하는 기후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보수가 이 의제를 진보로 몰아붙이는 한, 보수는 영원히 소수의 입장에 서게 될 수밖에 없다. 인권, 세계시민의식, 공동체의 가치, 동료 시민이나 자연생태계와의 연대와 공존 등은 공교육이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이다. 난데없는 ‘킬러’ 문항의 공격 앞에서 가치중립적인 문제풀이식 학교교육으로 회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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