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쉿’ 정부

2023.09.18 20:30 입력 2023.09.18 20:32 수정

[기자칼럼] ‘불쉿’ 정부

불쉿(Bullshit)!

한국어로 옮기자면 ‘허튼소리’와 비슷한 뜻의 ‘불쉿’은 왓챠에서 볼 수 있는 미국 드라마 <포커페이스>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대사다. 배우 나타샤 리온이 낮고 걸걸한 목소리로 “불쉿!”을 외칠 때면 통쾌하지 않을 수 없다. 리온이 분한 찰리 케일은 거짓말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인간 거짓말탐지기’다. 일단 사람부터 죽여놓고 시작하는 이야기 속에서 찰리는 자신의 비범한 능력을 바탕으로 범인을 밝혀낸다.

특이한 것은 찰리는 경찰도, FBI도, CIA도,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이다. 카지노 폭력배에게 쫓기는 신분인 찰리는 ‘노바디(nobody)’에 가깝다. 도망자로서 어떤 공적 신분을 획득하는 것도 불가능한 찰리는 카지노 바텐더, 식당 종업원, 요양원 청소부 등 불안정·비정규직을 전전한다. ‘불쉿’ 능력으로 진실을 알아낼 때도 범인은 오히려 ‘너 같은 떠돌이 말을 누가 믿어주겠냐’고 비웃으며 무시한다. 사회는 떠돌이·중년 여성·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찰리는 굴하지 않고 사건 주변을 헤집고 다닌다. 범인은 자승자박하기 마련이며, 진실은 마침내 스스로 드러난다. 베리타스 럭스미아(진리는 나의 빛)!

“불쉿!”이 통쾌한 이유는 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터져나온다는 점이다. 거짓말을 알아채는 것이 사고의 영역이 아니라 본능의 영역이기 때문에 점잖을 떨어야 할 상황에도 예외는 없다. 위선을 떨며 거짓말을 하는 이 앞에서 자동반사처럼 나오는 “불쉿!”은 후크송처럼 중독성 있다.

<포커페이스>에서 찰리 케일은 낡은 하늘색 차 한대를 끌고 미국 전역을 떠돈다. 파라마운트 제공.

<포커페이스>에서 찰리 케일은 낡은 하늘색 차 한대를 끌고 미국 전역을 떠돈다. 파라마운트 제공.

<포커페이스> 이야기를 꺼낸 건 요즘 입에서 “불쉿!”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에 정부 잘못은 전혀 없다고요? 불쉿!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안전하다고요? 불쉿! 학생인권이 교권을 침해하는 원인이라고요? 불쉿!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항명을 저질렀다고요? 불쉿! 헌재에서 합법으로 인정한 자기결정권에 따른 임신중단이 ‘미사여구’에 불과하다고요? 불쉿! 찰리 케일이 한국에 살았다면 뉴스를 보며 연신 “불쉿!”을 외쳐대고 있을 것이다.

거짓말은 주로 권력자의 편이다. 권력이 많을수록 거짓말로 감춰야 할 잘못도 많고, 취할 수 있는 이득도 많다. 무엇보다 거짓말을 ‘진실’로 밀어붙일 자원이 많다.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자신의 입맞에 맞는 이야기만 취사선택하기 쉬운 ‘탈진실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권력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해 ‘눈 가리고 아웅’을 계속하며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엔 ‘괴담’ ‘가짜뉴스’라고 낙인찍으려 한다. 아무리 비판해도 눈도 깜빡 하지 않는다면, 거짓을 폭로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무력해지기 쉽다. 일본 시민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해 “어차피 반대하더라도 정부는 방류를 강행했을 것”이라며 자포자기한 반응을 보인 것이 그 예다.

<포커페이스>의 찰리가 범인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거짓말을 알아채는 ‘불쉿’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협박당하고 무시당해도 굴하지 않는 ‘꺾이지 않는 마음’ 때문이었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주변부에서 그는 거짓을 폭로하고 드러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에게 국가 운영을 좌지우지할 권력도, 거짓을 알아채는 초능력은 없어도 거짓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은 있다. 중요한 건 “불쉿!”이 아니라 ‘중꺾마’(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다. 정권은 영원하지 않고, 진실은 밝히길 포기하지 않는 한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이영경 문화부 차장

이영경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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