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과 윤 정부의 ‘초심’

2023.09.25 20:38 입력 2023.09.25 20:39 수정

지난해 6월 발간된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백서’라는 자료가 있다. 윤석열 정부의 향후 5년을 향한 ‘초심’이 담겨 있다. 백서에는 ‘윤석열 정부 출범의 의미와 국정비전’이라는 단락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5가지 국정 목표가 언급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추격자에서 선도자로’라는 제목의 목표다. 국가 과학기술을 어떻게 발전시킬지에 대한 철학이 녹아 있다.

주요 문장 몇 개를 소개하면 이렇다. “선진국은 과학기술 패권을 두고 무한경쟁에 돌입했다”며 “기초과학과 원천기술을 보유한 국가만이 글로벌 선도 국가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면서 “연구 환경부터 과학기술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담대하게 변화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그다음이다. “변화는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며 “전문가들이 국가 과학기술에 대한 전략 로드맵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과학연구 관리시스템도 정부가 관리하기에 편리하도록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모험적 연구와 실험의 실패를 용인하며 정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장기간 연구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옳은 말들이다. 그런데 이 백서가 나온 지 1년 만에 대한민국 연구·개발(R&D) 현장에서는 정반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내년 R&D 예산을 올해보다 16.6% 삭감했다. 액수로는 5조2000억원이다. 정부 R&D 예산이 깎인 것 자체가 1991년 이후 처음인 데다 액수 또한 매우 크다. 백서에 적힌 대로라면 이 정도 큰일은 과학자들과 토론하고 상의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과학연구 관리시스템을 정부 편한 대로 운영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지난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뒤 단 두 달 만에 R&D 예산이 5조원 넘게 날아간 것이다. 그런 결정은 대통령과 정부 관료가 ‘알아서’ 했다. 과학기술계에서는 “예산 삭감 과정에서 R&D 현장에 있는 과학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한 백서의 다짐과는 크게 배치된다.

그것도 모자라 정부는 과학기술계를 ‘카르텔’ 집단으로 몰아갔다. 카르텔은 특정 이득을 꾀하려고 담합을 하는 집단에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카르텔은 감독당국의 눈을 피하거나 속여야 가능하다. 빡빡한 정부 심사를 통해 주어진 연구비로 일하는 과학자들의 생리를 안다면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R&D 예산을 깎으며 ‘과학자 당신들이 카르텔을 만들어 예산을 낭비하는 바람에 지금 적절한 조정을 가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밀었다.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린 과학기술계는 “카르텔의 근거가 뭔지 밝히라”는 집단성명까지 냈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문제를 바로잡을 기회는 남아 있다. 국회는 예산 심사 과정에서 정부 R&D 예산 삭감의 타당성을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인재와 기술에 대한 투자로 이만큼 일어선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이정호 산업부 차장

이정호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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