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노 대통령과 클린턴

2007.06.10 18:36

“아버지가 대통령이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출마한 사람이다.”(클린턴)

“대통령이 정치 훈수꾼이나 되려고 시간을 낭비하다니 놀라울 뿐이다.”(부시)

2000년 7월 미 대선 국면에서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과 공화당의 조지 부시 대통령 후보가 맞짱을 뜨며 내뱉은 말이다. 아버지 부시마저 아들 역성을 들고 나섰다. 다음날 TV 인터뷰에서 “계속 (내 아들을) 공격하면 인간 클린턴에 대한 나의 평가를 공개할 것”이라고 되받았다. 짐짓 점잖은 그도 자식사랑에 볼썽사나운 꼴을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항변이 틀린 건 아니다. 검사만 막나가는 게 아니다. 정치인들은 더 막나간다. 일견 이해가 간다. 정적(政敵)의 손발을 묶는 데 독설을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노대통령이 지난 8일 원광대 ‘명박’ 강연에서 비판한 대상은 야당의 대권후보 지망생들이다. 아직 공식후보도 안된 사람들에게 훈수를 둘 정도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리 한가한 자리는 아니다. 야당 후보의 공약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말일지언정 평가는 온전히 국민의 몫이다. 평가를 도맡을 권리는 없다. ‘막 후진국을 벗어난, 독재국가를 벗어난 국가’에서는 그런지 몰라도.

노대통령과 클린턴은 비슷하다. 세계화와 친한 ‘무늬만 진보’였다. 둘 다 변호사 수업을 해서인지 말을 좋아한다. 두 사람 모두 세치 혀 탓에 재임 중 탄핵 위기를 겪었다. 클린턴도 취임 초 이틀 동안 마라톤 경제회의를 주재할 정도로 토론을 즐겼다. 하지만 “우리가 뭘 잘못했냐”면서 자화자찬하는 연설로 4시간을 떠든 적은 없다. 둘 다 물사업(장수천, 화이트워터)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미국도 대통령의 정치참여를 금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에 없는 선거법이 한국에는 있다. 엄연한 실정법이라도 ‘세계 유례가 없는 위선적인 제도’라고 비난할 언론자유가 대통령에게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야말로 세계 유례가 없는 국가보안법을 임기 5년 동안 온치시킨 ‘민주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다. 대통령의 정치활동을 보장한 공무원법과 선거중립을 명시한 선거법의 모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건 노대통령의 선택이다. 하지만 막말에도 문화가 있다.

아버지 부시가 말하고 싶어 입을 달싹였던 ‘인간 클린턴’의 이력에는 탄핵 빌미였던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추문이 포함됐음직하다. 클린턴은 위증이 탄로나자 귀엽게 이실직고했다.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노대통령이 최근 부쩍 강조하는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는 대통령이 자신에게 봉급을 주는 국민들에게 이처럼 겸손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클린턴은 퇴임 무렵 65%의 지지율을 받았다. 노대통령이 그토록 목말라하는 바, ‘지표와 증거에 근거한 정책 평가’ 덕분만은 아닐게다. “무슨 말을 하거나, 이론을 말할 때도 독선적이거나 극단적이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망이 있어서” 그런 것일게다. 노대통령 자신이 원광대 강연 모두에 한 말이기도 하다. 클린턴이 막말을 했다고 치자. 그래도 “그래, 르윈스키와 잤다. 어쩔래”라는 말과 “그놈의 헌법…”이라는 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부적절할까. 또 “쪽팔리다”고 했던가. 한국이나 미국이나 대통령 자리를 떠날 때가 되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심지어 부시도 그렇다.

〈김진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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