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궐선거가 지나간 자리

2015.05.05 20:58 입력 2015.05.05 21:17 수정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작년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수행한 적이 있다. 유권자들에게 세월호 사고를 상기시키고 그 책임 소재를 물어보는 순간, 여러 정치적 대상, 특히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정당에 대한 이들의 호감과 신뢰가 동시에 하락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정동칼럼]보궐선거가 지나간 자리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당보다는 오히려 야당에 대한 호감과 신뢰가 세월호 사고로 인해 더 하락했는데 그 이유는 ‘정치에 대한 실망’을 가장 심하게 느끼게 된 사람들이 야당의 전통적 지지층인 도시 지역의 젊은 유권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순수하게 선거공학적으로만 이야기한다면, 새정치민주연합이 작년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세월호 심판’을 부르짖으면 부르짖을수록 선거전략으로서는 자해행위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점이며, 오히려 새누리당 지도부가 진행했던 광화문의 ‘1인 시위’나 ‘집값 상승의 약속’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지난주에 치른 보궐선거는 그런 의미에서 작년 지방선거의 재판을 보는 것 같다. 달라진 것은 ‘세월호 사고’에 1년만큼의 더께가 쌓이고 그것이 ‘성완종 리스트’라는 새로운 이슈로 대체되었다는 점이지만, 여전히 유권자들은 정부의 누적된 실정(失政)에 대해 여당을 응징하지도, 야당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정부가 정책을 집행하고 여당은 그것에 대해 선거에서 시민들로부터 심판을 받는 대의민주주의적 책임성의 모델을 누구나 개념적으로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것이 최근 한국 정치에서 실제로 구현되지는 않은 것이다.

현실은, 특히 오늘의 유권자들은 이보다는 좀 더 복잡한 얼개로 움직이는 듯하다. 유권자들은 여야의 책임성을 따지면서 분노하지 않고, 그 분노는 정치권 전반을 휘몰아치곤 한다. 큰 이슈에 쉽게 달아오르지만 금방 싫증을 내거나 무기력해지고, 공동체를 염려하지만 그것은 손톱에 가시가 없을 때만 그러하며, 항상 조삼모사에 현혹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과거 정책에 대한 평가와 미래 가능성에 대한 고려를 저울질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안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유권자들은 고민할 것이다. 야당이 실패한 것은 이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지난 세기 불었던 선거의 ‘바람’을 기다리며 ‘공중전’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이는 여당이 수행한 “길이 뚫리고 물길이 열리며 땅값이 오르는” 지상전에 대비된다.

야당의 딜레마를 십분 이해할 수는 있다. 10여년 전에 지구당이 폐지된 이래 현장에서 와해된 정당조직을 생각한다면 애초에 바닥을 훑는 지상전은 여당과는 달리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야당이 지역개발 공약으로 여당과의 경쟁에서 승산이 있다고 장담하기도 힘들다. 선거 유불리를 떠나서 정치부패와 정권심판을 대중들에게 역설할 기회를 포기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1년밖에 임기가 남지 않은 ‘고작’ 4명-의회 다수가 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이번 선거를 당운과 후보자 개인들의 미래를 걸고 정권의 중간평가 선거로 치른 것은 현명하지 못했다.

야권분열을 막지 못한 야당 지도부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 또한 당연하지만, 이것은 한국이 성숙한 양당제 국가이며 새정치민주연합이 독점적 제1야당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정치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조직으로서의 정당’ 못지않게 유권자들의 ‘머릿속에 있는 정당(party-in-the-electorate)’이 중요하다면, 우리 유권자들의 머릿속은 양당제라기보다는 이미 상당히 분화된 다당제로 가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는 억지로 통합된 제1야당을 하나의 조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지난 선거가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한다. 너무 성급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차라리 복수의 야당이 연정을 고려하거나 정책사안별로 협력하고, 특히 선거에서 연합공천하는 형태도 미리 고민해두어야 할지 모른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얼마 남지 않은 내년 총선과 이후의 정치적 일정을 바라보는 야권의 전망이 밝지 않다는 점이다. 강력한 여당과 분절화된 야권의 여러 세력들, 유권자들에 팽배한 불신과 정치적 무기력감, 비타협적인 행정부와 괴멸된 지방 조직, 어느 것 하나 유리한 점이 없어 보이지만, 아마 해답은 장기적인 정치적 비전과 정책적 디테일을 설득력 있게 연결하는 능력에 달려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서의 연구를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유권자들이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것 같지만 평균적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정당과 후보자들에게 보상과 응징을 언젠가 수행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지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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