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화 아닌 남북 의료협력

2015.10.25 21:12 입력 2015.10.25 21:17 수정
이진석 | 서울대 의대 교수

8년 동안 컴퓨터에 묵혀놨던 파일 하나를 열어봤다. ‘남북 보건의료 협력 방안: 개성, 황해도 지역보건의료체계 시범 운영’.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정부 요청으로 작성했던 사업 계획서이다. 의료물품과 장비 지원, 병원 시설 개·보수 등 일회성 대북 지원사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북한 스스로가 자생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지역 단위의 의료체계 구축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해 개성시와 황해도의 군 단위 농촌 1개 지역을 대상으로 도시형과 농촌형 시범사업을 시행하고, 향후 북한 전역에 그 모델을 확대 적용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처음부터 남북 간의 10·4 공동선언을 부정했고, 천안함 폭침 사건과 뒤이은 5·24 대북 제재조치로 북한과의 교류와 지원을 전면 중단했다. 그 이후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수많은 대북 의료지원과 교류 사업도 사실상 중단됐다.

[정동칼럼] 영리화 아닌 남북 의료협력

1990년대 대기근 시절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북한의 의료 실태는 여전히 열악하다. 붕괴된 의료체계는 복구되지 않았고, 의료물품과 약을 의료기관이 아닌 장마당에서 구해야 하는 사정도 여전하다. 식량 부족과 열악한 의료 실태는 북한 주민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출산 여성과 신생아 사망률은 한국의 7~8배에 달하고, 영·유아의 약 30%가 만성적인 영양장애 상태이다. 어린 시절의 영양 결핍은 전 생애에 걸쳐 심각한 장애를 야기한다. 외부의 지원이 절실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열악한 의료 실태를 방치해 왔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국익에 반하는 것이다.

의료가 국익에 기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사회가 부담 가능한 비용으로 국민의 건강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국민의 건강 향상은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을 줄이고, 저출산·고령화 사회에서 국가 경쟁력의 원천인 노동력의 양과 질을 확보하게 해준다. 그런데 정부는 통일을 이야기하면서도 미래의 의료비 폭증을 야기하고, 노동력의 양과 질을 악화시키는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 그 정책이 바로 5·24 대북 제재조치다.

국제 연구들에 따르면, 무역 제재조치는 해당 국가의 지배세력에게는 별 위협이 되지 않는 반면, 어린이·여성·노인의 건강에는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역시 제재조치의 일차적인 피해자는 이들이었다. 1600만명에 달하는 북한의 어린이·여성·노인의 건강을 위험에서 구하는 것은 미래의 막대한 의료비 지출을 줄이고, 노동력의 양과 질을 확보하는 투자이다.

북한의 청장년도 안심할 대상은 아니다. 미국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과 공동으로 북한 이탈 주민의 건강 상태를 조사한 고려대 김신곤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대기근 시절에 성장기를 거친 북한의 청장년은 각종 만성질환에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랜 기간 영양결핍 상태였기 때문에 음식을 먹으면 체내에서 최대한 지방으로 축적하려는 체질이 된 것이다. 이들은 당뇨병과 각종 심혈관질환의 고위험 집단이다.

대북 의료지원과 교류 중단은 막대한 통일비용을 자초하는 자해 정책이다. 독일 통일의 경험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독은 통일 십수년 전부터 동독의 보건의료 개선을 위해 대규모 지원을 지속해 왔다.

그럼에도 통일 이후 20여년 동안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하고서야 동독과 서독 주민의 건강 격차가 어느 정도 해소됐다. 서독과 동독보다 훨씬 큰 남한과 북한의 격차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찔하다. 뜬금없이 통일세를 거론하는 것보다 통일비용을 줄이는 노력이 먼저다.

정부는 국익을 앞세워 의료 영리화 정책을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다. 의료 영리화를 하면 국민의 의료비 부담은 줄고 병·의원을 비롯한 의료산업의 수입은 늘어난다고 한다. 마법 같은 이야기다. 의료를 수출해서 큰돈도 벌 수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공공의료를 위해 의료 영리화를 해야 한다는 기상천외한 주장까지 하고 있다. 의료 영리화는 국익을 망치는 정책이다. 진정으로 국익을 위한다면, 의료 영리화가 아니라 남북 의료협력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식량과 의료 지원을 막는 5·24 대북 제재조치를 해제해야 한다.

최근 의료계를 비롯한 민간 차원에서 북한 의료 지원 재개와 통일 시대의 보건의료를 준비하기 위한 다각도의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반가운 소식이다. 정부가 나서기 싫다면, 민간 차원에서라도 사업을 재개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 이번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갈등의 불씨를 줄인 것이라면, 남북 의료협력은 미래의 씨앗을 키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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