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인문사회과학도들의 곤경

2015.10.22 20:44 입력 2015.10.22 20:47 수정
김명환 | 서울대 교수·영문학

1980년대 초·중반에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학자가 20대에 교수가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권을 쥐자마자 단행한 소위 ‘7·31 교육개혁’으로 졸업정원제가 실시되어 대입 정원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갑자기 교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인문사회계도 취직이 비교적 쉬웠다. 지금은 특수한 분야를 제외하면 박사학위 없이 교수 초빙에 응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지만, 그 당시는 석사만 가지고도 교수가 되곤 했다. 따라서 대학원 박사과정에 현직 교수로서 학업을 겸하며 학위를 취득하는 이가 많았다. 직장에서 휴직을 허락받고 외국 유학으로 박사 학위를 따고 돌아와 복직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오늘의 대학원생이 들으면 꿈 같은 얘기이다.

[정동칼럼]젊은 인문사회과학도들의 곤경

군사정권의 마구잡이 정책이 좋았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실제 이런 호시절은 잠시였다. 정부가 고등교육에 대한 투자를 외면하고 긴 안목의 대학정책·학문정책을 세우지 않은 탓에, 교원 충원율은 제자리를 맴돌았고 인문사회과학의 박사 실업자 문제는 계속 악화되어 왔다. 해외 유학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인문사회계 학생이 박사 학위를 따는 데 걸리는 기간은 학업에 전념하게 해줄 생활장학금이 없어 자꾸 길어진다. 그러니 오래전에 40세를 훌쩍 넘긴 인문사회계 초임교수의 평균연령은 갈수록 높아지는 추세이다.

신진 연구자가 박사 학위를 받는 연령과 교수가 되는 연령이 모두 높아지는 가운데, 대학들이 정규직 전임교수를 줄이고 비정규직 교수를 크게 늘리는 바람에 상황은 더욱 열악해지고 있다. 자연히 젊은 인재는 점점 더 학문의 길을 외면하게 된다.

40대 초반에 교수 생활을 시작한 인문사회과학자는 연구실적 압박과 강의를 포함한 각종 업무 증가를 견디고 살아남아야 한다. 미국과도 달라 한국 대학은 대개 조교수 4년과 부교수 6년, 도합 10년을 근무해야 정년보장을 받는다. 40세를 넘겨 취직을 하고 50세를 넘겨 정년보장이 된다면, 65세까지 일하는 안정된 직장이라는 세간의 통념과 크게 어긋난다. 심지어 정년보장을 통과한 교수의 자율성과 신분을 위협하는 제도도 생겨나고 있다. 이런 처지의 학자가 학생 교육에 온 힘을 기울이는 동시에 국경을 뛰어넘어 인정받을 우수한 연구성과를 내놓기는 어렵다. 분야를 막론하고 신진 교수가 30대 중반에는 첫 직장을 잡아야 활기찬 연구와 교육을 기대할 수 있다.

한국 대학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밑바닥을 맴돈다. 하지만 학령인구 감소를 명분으로 한 정부의 구조조정에 편승해서 많은 대학이 인문사회계 학과를 축소·폐지하며 교수를 줄이고 있다. 취업에 불리한 전공은 무의미하다는 단순논리가 대학을 지배한다. 졸업생의 취업은 물론 중요하며, 대학도 갖가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청년 실업의 일차적 책임은 사회구조, 경제정책 등에 있지 대학에 모든 책임을 돌릴 일은 아니다.

인간 사회와 역사에 대해 깊은 이해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다운 삶을 지키는 동시에 풍요롭게 할 인문사회계 기초학문의 중요성과 잠재력에 대해 실질적 지원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정책 당국은 이 분야를 위해 진지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장기계획을 세울 뜻이 전혀 없는 듯하다. 그뿐이랴. 집권당 대표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하며 한국사학계의 80%는 좌파라고 거침없이 내뱉는 말에서 문학, 역사, 사회과학과 철학이 길러내는 비판적 인문정신을 짓누르려는 악의가 맨얼굴을 드러낸다.

모 대학의 대학원 자치회 간행물에 ‘학문후속세대’라는 말을 비판하는 글이 실렸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이 용어의 배후에 대학원생을 학문 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 대접하지 않고 조련해야 할 미숙한 학생으로만 보거나 교수의 연구사업에 부려 먹을 인력으로만 대하는 사고가 숨어 있다는 취지의 비판이었다. BK사업 등이 나온 1990년대 말 이래 ‘학문후속세대’는 학문세계에 투신하는 인재가 감소하는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신조어이다. 하지만 ‘후속’이라는 생경한 어감의 단어는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겸허한 자세, 즉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전통과 멀어 보인다. 또 ‘세대’는 사제와 선후배 간에 맺어진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활력을 잃어가는 현실을 방증하는 것만 같다. 나를 포함하여 30대를 넘기기 전에 전임교수가 된 50대 후반 이후의 기성세대 역시 깊이 성찰하고 실천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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