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2018.02.18 20:45 입력 2018.02.18 20:47 수정

‘저스트 라이크 클로이 킴(Just Like Chloe Kim).’ 평창 동계올림픽의 스타가 된 한국계 미국인 클로이 킴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는 3분26초짜리 동영상이다. 주한 미국 대사관이 진행 중인 ‘걸스 플레이 2’ 캠페인(#GirlsPlay2!)의 일환으로 제작된 이 영상에서 클로이 킴은 면온초등학교 스노보드 선수들과 함께 출연하여 여학생들의 체육활동을 독려한다. 화면 속 여학생은 말한다. “제가 나중에 컸을 때 ‘여자들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슬로건은 자연스럽지만 강력하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등장한다. 여자라고 못할 일은 없다. 열심히 하고, 재미있게 즐겨라.

[정동칼럼]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일주일 전, 아이돌 그룹 ‘에이핑크’의 멤버 손나은이 자신의 SNS에 아침 식사를 하는 사진을 한 장 올렸다. 사진 속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에는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댓글난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손나은 너마저 페미니스트냐, 혹시 메갈이냐, 군대 가라 식의 글들이 이어졌고, 심지어는 김치녀라는 난데없는 비난도 얹혔다. 게시물은 곧 삭제되었지만, 여진은 계속되었다. 남성들의 비난 때문이 아니라 페미니스트들의 응원 댓글 때문에 게시물을 내렸다는 출처 불명의 설명도 퍼졌다. 해명은 단순했다. 문구가 새겨져 있던 스마트폰 케이스는 프랑스 브랜드인 ‘쟈딕앤볼테르’ 제품을 협찬받은 것이며, 손나은은 해당 브랜드 화보를 촬영 중이었고, SNS 사진은 일종의 스포일러 목적이었다고 한다.

손나은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여기는지, 인권이나 여권 혹은 성평등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미 대사관이 제작한 동영상 속의 문구는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일 똑같은 사람들이 한 젊은 연예인의 스마트폰 케이스 속 문구에는 발끈하여 “밥줄을 끊어버리겠”다고 나섰다는 점이다.

실제로 “소녀에게 왕자님은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성우가 퇴출된 사례도 있으니 단순한 겁박만은 아니다. 이 두 경우는 다르다며 굳이 구별짓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페미니즘 포비아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슬로건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는 오지도 않았거니와, 뭐라도 하려면 너무 힘들다. 젊은 남성 연예인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선언하면 칭송받지만, 젊은 여성 연예인은 혹시나 페미니스트라 ‘의심’받을까봐 조심해야 한다. 원로 남성 문인의 술시중을 거부하면 시인의 꿈을 접어야 하고, 권력을 가진 예술감독이 호텔 방으로 불러 마사지를 시켜도 군말 없이 해야 연극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과연 ‘여자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라 말할 수 있는가?

얼마 전 발표된 삼성전자의 임원 승진자 221명 중 여성 신임 임원은 7명에 그쳤다고 한다. ‘여성인재 발탁’을 내건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도 30명 임원 중 3명만 여성이었다.

안태근 검사가 공공연한 자리에서 후배 검사를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나오자 여성뿐 아니라 많은 남성들도 경악하고 분노했다. 비슷한 시기, EBS의 토크쇼 <까칠남녀>가 조기 종영되었는데, 기독교계의 반(反)동성애 운동과 더불어 소위 ‘안티-페미니즘’ 정서가 폐지에 큰 역할을 했다. 이 프로그램은 성평등 관점 확산에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받아 ‘2017 푸른미디어상’ 성평등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런데 <까칠남녀> 폐지를 주장하던 입으로 남근검찰의 성도착적 적폐를 욕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자가당착이다. <까칠남녀> 속의 은하선과 손희정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아야, 오히려 점점 커져야 미니-안태근이 없어지고 제2의 고은과 이윤택이 슬그머니 기어나오는 일을 막을 수 있다.

클로이 킴이 여성도 훌륭한 스노보더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 경험을 용감하게 폭로하는 것을 무관한 일인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다면, 성평등한 사회는 요원하다. 완곡하기 그지없는 슬로건 하나를 실제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의 공포와 등치시켜 비난하는 이들이 많다면, 성평등은커녕 극히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되지 못했던 과거로 회귀될 것이다.

‘좋은 페미니즘’과 ‘나쁜 페미니즘’ 감별사를 자처하는 이들, 혹은 이론적·실제적 의미가 거의 없는 ‘이퀄리즘’을 페미니즘의 대안이라 상찬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는 말은 자연스러운데 “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가 거슬린다면, 그건 당신의 젠더감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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