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사이공 함락

2011.04.29 21:01
정진호 기자

국가리더십 실종 탓 월남 패망 불러

1975년 4월30일 새벽 4시30분, 그레이엄 마틴(Graham Martin) 주월미대사는 국기게양대에 걸려 있던 성조기를 내리고 사이공의 미대사관을 떠난다. 그리고 오전 9시 정각, 대사관 내 주요 시설물 파괴를 마친 미 해병대를 태운 마지막 미군 헬기가 날아올랐다.

미 대사관의 철수가 끝나고 2시간30분이 지난 오전 11시30분, 월맹(북베트남)군 탱크는 월남(남베트남)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독립궁’의 철문을 무너뜨린다. ‘독립궁’ 마당에 진주한 월맹군은 건물 위에 월맹기를 휘날리며 승리를 자축한다. 라디오에서는 이미 몇 시간 전부터 “월남군은 무조건 항복하며 전군은 발포를 중지하라”는 즈엉반민 월남 대통령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국을 버리고 타이완으로 도망친 구엔 반 티우 전 대통령 후임으로 그가 대통령직을 떠안은 지 9일 만이다.

[어제의 오늘]1975년 사이공 함락

관점에 따라 개전 시기에 대한 판단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1955년부터 20년간 계속된 지루한 전쟁은 끝을 맺었고 다음날인 5월1일 사이공시는 월맹의 지도자 이름을 딴 호찌민시로 이름을 바꾼다.

당시 월남군은 미군이 떠나며 남겨준 무기를 승계하여 병력·화력 면에서 월맹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특히 항공 전력의 경우 세계 4위의 수준을 자랑했다. 반면 사이공 함락 당시 기록영상 속 월맹군 상당수는 슬리퍼에 소총 한 자루를 어깨에 걸고 있을 뿐이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월남정부에 강력한 무기는 고철과 다름없었다. 월남 패망의 이유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무엇보다 국가리더십의 실종을 주요 요인으로 꼽을 수 있겠다.

1887년 프랑스의 식민지배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외세의 간섭을 받아온 베트남이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 분단국가에서 통일국가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지만 오랜 전쟁으로 이뤄낸 독립과 통일의 대가는 혹독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월남군 25만명과 월맹군 100만명가량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민간인 사상자도 200만명을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미 공군이 베트남 땅에 투하한 폭탄은 2차대전 때 쓰인 양의 두 배에 육박한다. 국토는 피폐화되었고, 고엽제로 인한 장애와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36년 전 종결된 월남전이 주는 교훈은 ‘빠른 통일’보다 평화를 위한, 평화에 의한 ‘바른 통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남북관계의 개선은 필수적이다. 때마침 최문순 강원지사는 “남북관계를 살려 강원도를 살리겠다”는 화두를 던졌다. 이번 4·27 보선에서 보수의 텃밭을 뒤엎은 ‘강원도’의 실험에 거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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