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피해 물에 잠긴 ‘추석 농심’

2000.09.01 19:06

태풍 ‘프라피룬’이 휩쓸고 간 충청·호남지역의 논과 과수원은 마치 포탄을 맞은 전쟁터 같았다. 사상 최대의 강풍을 동반한 이 태풍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벼와 과일들을 무참하게 짓밟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사과·배 등 수확을 앞둔 과일들이 수도 없이 떨어져 어지럽게 나뒹굴었으며 곡창지대의 넓은 들판 곳곳엔 벼들이 납작하게 쓰러져 불도저가 밀어버린 듯했다. 하루 사이에 풍년의 꿈이 사라진 것이다. 특히 30~80로 추정되는 낙과 피해는 1959년 ‘사라’, 지난해의 ‘올가’ 때에 이어 세번째로 큰 것으로 농민들은 보고 있다.

1일 오후 3시 충남 서산시 팔봉면 진장리 과수단지. 농민들이 밭고랑마다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는 사과·배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 망연자실한 채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진장리는 전체 300여 농가 중 80정도가 사과·배 농사를 짓는 소문난 과수단지다.

이 마을 이민우씨(58)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태풍이 과수밭을 쓸고가니 우리 농민들은 이제 어떡합니까”라고 하소연했다. 밭 3,000여평에 배나무 400그루, 사과나무 300그루를 여름 내내 피땀 흘려 가꿔왔으나 과일들이 수확을 며칠 앞두고 하룻밤 사이에 배는 90이상, 사과는 60이상 떨어져 버렸다. 수확을 불과 20여일 앞두고 3천4백여만원의 소득이 날아가버린 것이다.

국내 최대의 배산지인 전남 나주 들녘은 어디 한곳 성한 곳이 없었다. 여기저기 떨어져 널브러진 배들을 바라보는 농민들은 연방 한숨을 토해냈다.

나주시 금천면 온곡리 천곡마을 이계봉씨(41)는 “8,200평의 배농사를 한나절에 망쳤다”면서 울먹였다. 수확 직전의 탐스런 배가 절반 가까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씨는 “배꽃 필 때 서리가 많이 내려 열매가 맺히지 않는 피해를 입었는데 태풍까지 겹쳐 올 농사는 망쳤다”며 “올해 갚아야 할 농협 빚 4천만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송촌동 이영웅씨(50)의 3,200평 배밭에도 떨어진 누런 배들이 뒹굴고 있었다. 이씨는 “15㎏ 들이 500상자를 미국과 캐나다로 수출키로 계약했는데 지킬 수 없게 됐다”면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물량을 대지 못하면 수출길이 완전히 막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나주 배밭 피해면적은 전체 3,108ha 중 2,443ha, 낙과피해는 20~40로 잠정집계됐다.

전북·경기 지역의 과수 피해도 컸다. 6,000평에 사과·배 농사를 짓는 전북 고창군 고수면 우평리 송기종씨(55)는 “작년에도 태풍으로 농사를 망쳤는데 올해 또 피해를 봐 빚만 늘어나게 됐다”며 하늘을 원망했다. 같은 마을 유원수씨(52)는 “10여년 과수농사를 짓고 있으나 이번처럼 강한 바람은 처음”이라면서 “떨어지지 않은 과일도 상품 구실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이번 태풍으로 벼농사 피해도 컸다. 조생종 벼를 심어 피해가 가장 큰 전북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 일대는 벼면적 1,475ha의 60이상이 쓰러졌으나 일손이 없어 벼 세우기 작업을 포기한 상태다. 1만여평에 벼를 심은 김종식씨(48)는 “낟알이 모두 여문 상태여서 벼를 빨리 세워야 하는데 집식구와 둘뿐이라 작업을 할 수 없다. 아예 올 농사를 포기해야 할 것 같다”며 한숨만 지었다.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강당리 들에서 태풍에 쓰러진 벼를 묶어 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이승로씨(54)는 “누구네 농사 가릴 것 없이 싹쓸어 엎었다. 추석을 앞두고 풍년 보람이나 가져볼까 한 기대가 모두 허사가 됐다”며 허탈감과 원망을 쏟아냈다.

〈유인석·박성현·배명재기자 yi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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