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의 동지’ 넘어…민주주의·여성인권 신장 헌신한 개척자

2019.06.11 22:25 입력 2019.06.11 23:01 수정

이희호 이사장이 걸어온 길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2002년 5월8일 대통령 부인 시절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2002년 5월8일 대통령 부인 시절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독재 치하와 민주화운동을 거쳐 수평적 정권교체와 여성인권 신장까지.

한국 현대사 100년을 오롯이 지켜본 산증인이자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긴 고난과 짧은 영광’의 한생을 마감했다.

고인의 한평생은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부인’이나 ‘퍼스트레이디’라는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희호의 인생은 ‘남편 김대중’을 떼어 놓고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일생만으로도 민주화운동가이자 여성운동계의 거목으로 존경받기에 손색없다.

이 이사장은 3·1운동으로부터 3년이 지난 1922년 서울 수송동에서 6남2녀의 넷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부친 이용기씨가 우리나라 ‘의사면허 4호’였을 정도로 ‘신식 집안’에서 자라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이순이씨의 영향으로 모태 신앙인이 된 그는 이화고녀(이화여고 전신)·이화여전을 다녔지만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이화여전을 2년 만에 강제로 졸업한 뒤 해방을 맞이했다. 1946년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해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교육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활달한 성격이었던 이 여사는 대학 재학 중 서울대 총학생회에서 사범대 대표를 맡는 등 당시 강요되던 ‘얌전한 여학생’ 딱지를 거부했다. 대학 재학 중 그의 별명은 ‘다스(das)’였다고 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의 활동만 봐서는 구별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남학생들이 붙인 것이다.

“히히호호” 웃으며 자기 이름 소개
서울대 사범대 대표로 리더십 발휘
여자청년단서 피란민 후송 도우며
해운사 사장 김대중과 운명적 만남

고 강원룡 목사는 <내가 만난 이희호>라는 책에서 “대학 강연 후 학생들과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는데, 그의 차례가 되자 ‘히히호호’ 하며 크게 웃는 것으로 ‘희호’라는 이름을 소개했다”고 회고했다. 발랄하고 활동적인 리더십으로 동료들을 이끌며 남학우·여학우를 가리지 않고 인기가 많았다.

대학 졸업 직후 발발한 한국전쟁은 그의 삶도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는 피란길에도 이태영·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을 따라 대한여자청년단(1950년), 여성문제연구원(1952년) 등의 창설에 일조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1990년 10월15일 단식 도중 세브란스병원으로 실려가는 김대중 평민당 총재 옆에서 걷고 있다. 연합뉴스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1990년 10월15일 단식 도중 세브란스병원으로 실려가는 김대중 평민당 총재 옆에서 걷고 있다. 연합뉴스

‘인생의 동반자’ 김대중과의 첫 만남도 이 무렵이었다. 이 이사장이 활동하던 대한여자청년단은 1·4후퇴 당시 피란민들을 배로 후송하기 위해 인천에 있는 해운회사 사장 김대중의 도움을 얻었는데, 이후 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긴 김대중과 대한여자청년단 간부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던 것이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옛 서울 지역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면우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희호는 이 모임에 간헐적으로 참석한 청년 김대중과 교우하며 신뢰를 쌓았지만 곧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램버스대에서 사회학 학사, 스카릿대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8년 귀국한 그는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 강단에 섰다. 이어 여성문제연구원 간사, YWCA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직 등을 맡으며 일천한 한국 여성운동사의 초창기를 썼다.

임시 수도 부산서 대학생 모임 주도
미국 유학 후 돌아와 본격 여성운동
DJ 납치·구금·망명 길고 긴 고난
해외 인사에 편지로 직접 구명 활동

미국 유학을 포함한 이후 여성운동은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모친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18세에 여읜 ‘소녀 이희호’는 당시 큰 충격 속에 세 가지를 굳게 다짐했다. “ ‘결혼하지 않는다’ ‘건강해야 한다’ ‘공부를 많이 하자’ 그것만이 어머니의 뜻을 이루는 길”(이희호 자서전, <동행>)이었다고 믿어왔던 그였다.

그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나머지 두 약속은 잘 지켰지만, 첫 번째 다짐인 ‘비혼(非婚)’만은 지키지 못했다. 1962년 ‘정치 낭인’ 김대중과의 결혼으로 이 약속이 깨진 것인데, 이후 그는 40년 가까이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이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위협하며 정권의 최대 공적으로 떠오른 뒤부터 김대중·이희호 부부는 갖은 고초에 시달렸다. 1972년 ‘10월유신’ 이후 김 전 대통령이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들며 납치·구금·연금을 당하는 동안, 이 이사장은 김 전 대통령의 배우자·아내를 넘어서는 정치적 동지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77년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구속된 이후 이 이사장은 1년 가까이 석방투쟁을 벌이는 동시에 집안을 지탱하는 가장 역할도 맡아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일본 망명 때인 1972~1973년,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구속된 1977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수가 된 1980~1982년 이 이사장과 떨어져 지냈는데, 크나큰 시련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이 이사장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훗날 <옥중서신>이라는 2권의 책으로도 발간됐다. 집안일 등 일상다반사를 전하는 통상적인 서신 수준을 넘어 철학적·신학적 논쟁거리나 반독재 투쟁에 대한 격려와 내용까지 담겨 있어 ‘문학작품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2011년 12월2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신이 안치된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아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현 국무위원장)에게 조의를 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2011년 12월2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신이 안치된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아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현 국무위원장)에게 조의를 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이사장은 ‘DJ의 정신적 동지’ 역할뿐 아니라 출중한 영어 실력과 서구식 매너 등을 십분 발휘해 제5공화국 당시 미국 망명 생활 중 세계 각지의 유력 인사들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청년기 때부터 쌓아온 재야·여성·기독교계 인맥 등을 바탕으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반경을 확장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서울 동교동 자택 대문에 지금도 나란히 걸려 있는 ‘김대중’ ‘이희호’ 문패는 두 사람의 ‘동업자’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

퍼스트레이디 해외 단독 순방 개척
여성부 창설·남녀차별금지법 제정 등
굵직한 이슈 주도한 ‘독립적 정치인’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1987년 12월 당시 평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제주 유세에서 지원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1987년 12월 당시 평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제주 유세에서 지원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8년 김 대통령 취임 이후 ‘퍼스트레이디’로서도 역대 ‘영부인’과 확연히 구분되는 면모를 보였다. 대통령 당선 직후 여의도에선 ‘김대중 정부 지분 40%는 이 이사장 몫’이라는 말도 나왔다. 여성부 창설, 청와대 여성 비서관 10명 입성, 모성보호 3법 개정, 여성 장관 4명과 첫 여성 대사 임명 등은 이 이사장이 없었다면 추진되기 쉽지 않았을 일들이다. 그가 ‘여성운동가’로서 스스로 전문성을 가진 ‘독립적인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퍼스트레이디의 단독 해외 순방을 개척했고 2002년에는 퍼스트레이디 최초로 유엔 아동특별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김 대통령과 북한을 동행 방문한 것도 최초 기록이다. 남녀차별금지법 제정, 한국여성재단 발족(1999년), 결식아동 지원을 위한 사랑의친구들 창립(1998년) 등도 그가 이슈를 주도한 정치적 활동이었다. 미국의 존경받는 퍼스트레이디 엘리너 루스벨트의 한국판이라는 평가도 나왔지만, 1999년 옷 로비사건과 2002년 최규선 게이트로 활동은 다소 주춤해졌다.

김대중·이희호 부부는 1998년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와 함께 민주화의 거목으로 우뚝 섰지만, 그 과정에서 부부가 겪은 고초는 아들 3형제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2년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감사장을 받은 뒤 환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에 이희호 이사장이 보인다. 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2년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감사장을 받은 뒤 환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에 이희호 이사장이 보인다. 연합뉴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공안당국에 끌려가 고문당한 후유증으로 여생을 고통 속에 보낸 장남 홍일씨는 지난 4월 세상을 떠났다. 홍일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는 당시 이 이사장이 입원 중이었지만, 위중한 상황이어서 장남의 별세 소식도 전달되지 못했다. 둘째 홍업씨와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낳은 삼남 홍걸씨도 가택연금과 ‘사형수 김대중’ 딱지 속에 유년·청년기를 보내는 등 신산했던 부모의 삶의 여정을 그대로 물려받다시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2009년 4월 하의도를 방문, 큰바위얼굴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이 2009년 4월 하의도를 방문, 큰바위얼굴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9년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꼭 10년이 된 올해, 홍일씨와 이 이사장이 잇따라 그의 곁으로 떠났다. 군부독재의 시대를 맨몸으로 맞서 싸웠던 이들 가족은 기나긴 고난의 시대를 헤쳐왔다. 그 과정에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10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평생에 걸쳐 헌신했던 이 이사장이 있었다.

“우리는 오늘 한 명의 위인을 보내드리고 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애도 메시지처럼 그는 한국 민주주의와 여성운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인이었다.

‘DJ의 동지’ 넘어…민주주의·여성인권 신장 헌신한 개척자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