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우주로 가는 길, 어려운 길이기에 가겠다”는 대선 후보를 뽑겠습니다

2021.12.02 21:25
이종필 교수

한국만의 우주전략을 기대하며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한·미 미사일지침 최종 폐기로
제약 없이 발사체 만들게 됐고
10번째 국가로 ‘아르테미스’ 참여
누리호 첫 시험비행 성공까지
2021년을 특별하게 만든 낭보들
우주 진출의 커다란 이정표 세워

2021년이 한국에 특별하게 기억될 이유는 여럿 있다. G7 정상회의에 초청돼 거시경제 지표상의 순위를 넘어 실질적인 의미에서 G7에 버금가는 위상을 갖게 된 것이나, BTS의 노래가 빌보드 차트에서 무려 10주 동안 1위를 지킨 것이나,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휩쓸며 가히 신드롬을 일으킨 것이나 모두가 단군 이래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현상들이다.

그중에서 내가 꼭 짚고 싶은 소식은 우주와 관련된 낭보들이었다. 이는 우리의 미래를 더욱 긍정적으로 기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드디어 한·미 미사일지침이 폐기되어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발사체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미국이 주도하는 달 탐사 계획인 ‘아르테미스’에 10번째 국가로 약정하기도 했다.

10월21일에는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가 성공적으로 첫 시험비행을 마쳤다. 비록 모사체를 위성궤도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처음 개발한 300t급 1단 로켓이 우리의 기대대로 작동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 국내 언론에서는 모사체 궤도 진입 실패를 주로 보도했지만 외신들은 한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험에 성공한 것 아니냐는 다소 음모론적 해설을 내놓기도 했다.

미사일지침 폐기와 아르테미스 가입, 그리고 누리호 성공은 한마디로 말해 한국이 우주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렸음을 뜻한다. 미사일지침은 1979년 미국이 한국의 미사일 개발을 제한해달라는 요청에 한국이 화답하는 형식으로 성립된 뒤 네 차례 개정을 거쳐 지난 5월22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최종 폐기되었다. 2020년 7월28일 마지막 4차 개정 때 이미 사거리 800㎞ 초과 군사용 고체로켓을 제외한 모든 제한이 풀렸다. 이때부터 고체연료를 이용한 민간 우주발사체 개발이 가능해졌다.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누리호가 발사에 성공했으니 이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액체연료든 고체연료든 마음껏 개발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르테미스 계획은 50여년 만의 유인 달 탐사 계획이다. 인류가 달을 마지막으로 밟은 것은 1972년 아폴로 17호에 탑승한 유진 세르난과 해리슨 슈미트였다. 함께 우주선에 탑승한 론 에번스는 달궤도를 도는 사령선에 남아 있었다. 인간을 최초로 달에 보낸 미국의 아폴로 계획은 3인용 우주선 계획으로, 1인용 머큐리 계획과 2인용 제미니 계획의 후속이었다. 머큐리 계획의 우주선 프리덤 7호는 1961년 5월 미국 최초의 우주인 앨런 셰퍼드를 태우고 지구준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준궤도 비행은 지구 대기권을 잠시 벗어났다가 포물선 궤적으로 다시 대기 속으로 돌아오는 탄도비행이다. 지구 주변을 완전히 한 바퀴 도는 궤도 비행에 성공한 최초의 미국인은 1962년 2월의 존 글렌이었다.

이에 비해 소련은 앨런 셰퍼드보다 한 달 앞선 1961년 4월 유리 가가린이 지구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소련은 1957년 사상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호를 지구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하는 등 1960년대 중반까지 우주 개발에서 미국에 앞서 있었다. 소련은 지구궤도에 물체와 사람을 올려놓는 것뿐만 아니라 지구를 벗어난 천체 탐사에서도 앞서가고 있었다. 소련은 1959년부터 시작한 메치타 계획, 또는 루나 계획으로 달 탐사에 나섰다.

외계 천체를 탐사하는 방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탐사선이 천체에 근접해서 비행하거나 그 천체 주변의 궤도를 돌거나 또는 천체의 표면에 착륙할 수도 있다. 1959년 1월에 발사된 루나 1호는 최초의 달 탐사선이자 지구 중력장을 벗어나 태양궤도에 오른 최초의 우주선이다. 원래는 달 표면에 충돌하는 것이 임무였으나 그 임무는 실패했다.

이후 발사된 루나 탐사선들도 ‘최초’의 타이틀을 많이 달고 있다. 1959년 9월에 발사된 루나 2호는 달 표면 충돌에 성공해 최초로 달과 접촉한 우주선이 되었다. 1966년 1월에 발사된 루나 9호는 최초로 달에 연착륙해 달 표면의 사진을 전송했고 같은 해 3월에 발사된 루나 10호는 최초로 달궤도에 진입하는 데 성공해 460회 달 주변을 공전했다. 루나 16호(1970년 9월)는 달 토양을 채취해 지구로 귀환했고 17호(1970년 11월)에 실렸던 로봇탐사차 루나코드는 달 표면을 내달렸다.

미국은 1958년 8월 파이어니어 1A호를 발사하며 달 탐사에 나섰으나 발사 77초 만에 폭발했고 이후 1B호, 2호, 3호 모두 실패했다. 달 표면과 충돌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레인저호는 1호부터 6호까지 모두 실패했고 7호(1964년 7월)가 겨우 성공했다. 이후 1966년 5월 발사된 서베이어 1호는 달 표면에 연착륙하는 데 성공했고 같은 해 8월 발사된 루너오비터 1호는 달궤도를 도는 데 성공했다.

미·소 우주전쟁 역전의 출발점 된
케네디 대통령의 아폴로 계획처럼
우리도 중장기적 우주 정책 필요
미국 NASA·일본 JAXA 같은
국가 차원의 독립기구 만들어야

이런 상황을 역전시킨 출발점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등장이었다. 1960년 당선된 케네디는 이듬해 5월 말 의회 연설에서 유인 달 착륙 계획을 천명한다. 1962년 휴스턴의 라이스대학에서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다(We choose to go to the Moon)”라는 아주 유명한 연설을 하게 된다. 케네디는 대담하게도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소련보다 앞서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단언했다. 물론 그들은 무사히 지구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케네디가 라이스대학 연설을 했을 때는 글렌이 지구궤도를 선회한 지 겨우 7개월쯤 지났을 때였고 달 탐사선 레인저호가 실패를 거듭하던 때였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겠으나, 2021년 12월 현재 한국의 대통령이 2029년 12월31일까지 한국 우주인을 달에 보내겠다고 하면 어떨지 조금은 감이 올 것이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사람을 달에 보냈다가 무사히 귀환시킬 여러 방안을 고민했다. 지구에서 우주선을 바로 달에 보냈다가 그 우주선을 타고 다시 지구로 돌아오는 방법도 있고, 그 우주선을 지구궤도에서 조립해 달로 보내는 방법도 있고, 달궤도에서 착륙선을 분리하는 방법도 제시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비용은 적게 들지만 가장 위험한 세 번째 방법, 즉 달궤도 랑데부 방식이 채택되었다.

1961년부터 1972년까지 지속된 아폴로 계획에는 당시 기준으로 약 25조원이 투입되었다. 1967년 1월 발사 예정이었던 아폴로 1호는 합선에 의한 화재로 우주인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듬해 10월에서야 7호가 최초의 유인 아폴로 비행에 성공했고 결국 1969년 7월16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케네디의 호언장담이 실현된 셈이었다.

아쉽게도 케네디는 라이스대학에서 연설한 지 1년여 뒤 암살돼 역사적인 달 착륙을 보지 못했다. 아폴로 계획은 너무 성공적이었고 목표를 조기 달성하는 바람에 11호 이후에는 세인들의 관심이 예전 같지 않았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아폴로 18~20호 계획을 취소했다.

내년이면 인간이 달을 마지막으로 밟은 지 꼭 50년이 된다. 반세기나 지나 아르테미스 계획으로 다시 인간을 달에 보내려는 이유는 단지 다시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기기 위함은 아니다. 아르테미스 계획은 한마디로 말해 달을 일종의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야심찬 기획이다. 궁극적으로는 달궤도에 달과 우주를 연결하는 정거장으로서 게이트웨이를 띄우고 2028년까지 달 표면 극지방에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유인기지를 만들 계획이다. 아르테미스 계획에서의 성과들은 고스란히 화성 유인 탐사에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아르테미스 계획은 아폴로 계획 이후 인간의 우주 진출 역사에 큰 획을 그을 가능성이 높다. 올해 불과 몇 달의 시차를 두고 아르테미스 계획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누리호도 성공적으로 발사한 한국으로서는 우주 진출의 큰 이정표를 세웠다고 할 수 있다. 내년 8월에 발사할 한국의 달궤도선에는 NASA에서 개발한 고정밀 카메라 섀도캠이 장착돼 달의 극지방을 촬영할 예정이다. 이는 아르테미스 계획의 우주인들이 달에 착륙할 지점을 물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미 간의 본격적인 우주협력이 이미 시작된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도 이제 중장기적인 국가과제로서 우주전략을 수립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는 이렇다 할 국가 차원의 우주전략도, 이를 수립하고 집행할 독립기구도 없었다. 미국의 NASA나 일본의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 중국의 국가항천국처럼 독자적으로 한 국가의 우주정책을 총괄하며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부처를 새로 만드는 것부터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개 과가 우주정책을 도맡고 있는 실정이라 이미 시작된 우주시대를 책임지고 이끌어나가기에는 역부족이다. 미국이 NASA를 만든 것은 1957년 소련으로부터 이른바 ‘스푸트니크’ 충격을 받은 결과였다. 다행히 우리에게 2021년은 충격이 아닌 낭보의 해이다. 게다가 내년 대선과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으니 온 국민이 함께 국가의 미래비전을 우주에 투사해 보기에도 좋은 시기이다. 우주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지, 왜 우리는 우주로 나가고자 하는지, 우리는 우주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우주정책의 주안점도 달라질 것이다.

과학자로서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그 모든 역량이 군사 차원의 안보나 경제적 이득 등에만 한정되지 않았으면 한다. 당장 아무런 물질적 이득이 없더라도 인간의 순수한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순수한 과학연구에도 우주선의 자리 한편은 남겨주기 바란다.

라이스대학 연설에서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달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그것이 쉬운 일이라서가 아니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쉬운 선택만 해서는 발전과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가치 있고 올바른 방향이라면 어려운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우주와 관련해 “솔직히 이 길은 어려운 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대선 후보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한 표를 던질 생각이다.

▶이종필 교수

[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23)“우주로 가는 길, 어려운 길이기에 가겠다”는 대선 후보를 뽑겠습니다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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