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나는 네가 한 일을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2017.12.28 21:37 입력 2017.12.28 21:40 수정
박형주 한국뇌연구원 선임연구원

사진기억과 왜곡

[전문가의 세계-뇌의 비밀] (15) 나는 네가 한 일을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영화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에서는 젊은 청춘들이 들뜬 여름 밤 자동차 사고로 살인을 저지르고, 이 사건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시신을 유기한다. 하지만 1년 후, 이들은 “지난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는 의문의 편지를 보낸 살인자로부터 하나씩 죽임을 당하는데….

내가 살인자의 갈고리 앞에 서 있는 당사자라면, 그리고 다시 지난여름을 떠올리게 된다면, 억울한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싶다. 살고 싶다는 본능과 자신의 과오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자존심이 뒤섞여 이상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면서 내 머릿속에서 그 사고는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자동차에 치인 행인이 실제로는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가 괜찮냐고 물었다고 억지로 기억을 짜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죽어가는 이의 억울함에 동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청자는 이미 그 기억이 가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은 나에게 갈고리를 휘두르는 살인자의 기억 또는 영화를 관람하는 내가 이미 보았던 사건에 대한 기억들이다. 즉 타인의 기억은 나의 기억이 왜곡되어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사진기억과 왜곡된 기억

파란 신발을 신은 걸까, 노란 신발을 신은 걸까. 같은 상황을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는 뭘까. 인간은 기억을 사진처럼 찍어서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입맛에 맞게 요리해서 원하는 형태로 저장하기 때문이다.

파란 신발을 신은 걸까, 노란 신발을 신은 걸까. 같은 상황을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는 뭘까. 인간은 기억을 사진처럼 찍어서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입맛에 맞게 요리해서 원하는 형태로 저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타인의 ‘기억’이 항상 맞던가. 모든 사람이 같은 정보를 받아들여도 다르게 기억하는 예는 무수히 많다. 아내가 출산이 임박했을 때 최선을 다해 돌봤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아내는 힘들어하는 자신을 버려두고 내가 노트북 PC 앞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다고 기억하고 있다. 정말 억울하지만, 나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다. 물론 잠시 아내가 깊게 잠들어 있을 때 무료하고 피곤해서 노트북 PC를 만지작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내 연구실 동료들은 내가 목요일 저녁에 전체회의를 제안했다고 하지만, 난 토요일 아침이라고 말한 기억밖에 없다. 역시 억울하지만 다들 그러니 정말 그랬나 싶다. 매년 명절 때 큰아버지, 우리 아버지, 작은아버지는 과거에 옆 동네 누가 무슨 사고를 당했다는 추억을 되살리곤 하시는데, 조가네라고 했다가 전가네 둘째인지 셋째인지 매년 세부사항이 달라서 작은 말다툼을 하시는 것을 본다. 나는 예전에 들었던 것인데, 어른들 기억과 내 기억이 달라서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할 뿐이다. 주변의 예시 말고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항상 절대적인 사실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는 많다. 인간은 기억을 사진처럼 찍어서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입맛에 맞게 요리해서 원하는 형태로 저장하기 때문이다.

이미 심리학자 및 인지과학자들은 사람의 기억이 쉽게 왜곡되거나 변형될 수 있다는 현상을 오랫동안 보고해 온 바 있다. 더 나아가 신경과학자들은 ‘왜’ 또는 ‘어떻게’ 기억이 왜곡되는지 묻게 된다. 사람의 머리를 직접 파헤치며 연구할 수 없으니, 결국 실험동물의 희생을 통해 연구하게 된다(결과를 놓고 잠시 사람이 기억하는 방식이 동물의 그것과 같을까라는 의문이 들 법도 하다).

2007년 일본 과학자들은 어린 침팬지가 성인 인간보다 작업기억(working memory·짧은 시간 동안 특정 정보를 기억하는 능력) 능력이 뛰어나다고 주장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침팬지와 인간 앞에 10개의 상자가 있는 화면이 있다. 상자 위에는 1부터 10까지 숫자가 무작위적으로 표시되어 있다. 숫자가 사라지면 해당하는 상자를 1부터 10까지의 순서로 눌러서 맞추게 하였다. 그 결과, 침팬지는 90%가 넘는 정확도로 상자 순서를 맞추었지만, 인간은 수십 번 중 한 번 맞출까 말까 했다. 인간은 간단한 정보도 사진처럼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연구였다.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정보 차이가 2% 내외이고, 어린아이 일부는 침팬지와 유사한 사진기억을 갖고 있으며, 이 능력은 성인이 되면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인간은 사진처럼 기억을 저장하는 능력보다는 기억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작하여 저장하는 것을 진화적으로 선택해왔을 수도 있다. 일부 자폐증을 보이는 사람들도 사진기억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영화 <레인맨>에서 자폐증 환자 주인공이 바닥에 떨어진 성냥개비 숫자를 단박에 세어내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자폐증과 사진기억 능력 간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는지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럼 인간은 어떻게 기억을 자신에 입맛에 맞게 요리하는가?

기억이 말랑해질 때를 노리면…

역시 ‘동물은 기억을 어떻게 저장하고 인출하는가’에 대한 연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기억은 학습이라는 과정을 통해 신경계에 정보가 각인되는 것으로 단순하게 풀이할 수 있다. 반복 학습을 통해 입력된 정보 또는 서로 다른 정보를 엮어 한 뭉치의 특정 정보로 변환한 ‘그 무엇인가’를 뇌 어딘가에 저장해 놓았다가 오랜 시간 이후에 원래의 입력 내용에 ‘가깝게’ 인출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학습과 기억이다. ‘그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정체는 학계에서는 기억의 실체, 즉 엔그램(memory engram)으로 부른다. 엔그램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특히 신경회로망 또는 네트워크의 활성 패턴, 신경세포 내 특정 유전자 및 단백질 또는 시냅스(synapse) 구조 자체 등이 그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저장 형태 또는 저장 장소로 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신경세포 간의 연접 부위인 시냅스에서 신호전달 강도가 변하여 정보 저장 단계가 시작된다는 것에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억들은 입력된 경로와 유사한 방식으로 인출된다. 이때 인출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기억이 머릿속에 존재하는데도 소멸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일부 치매환자가 평소에 가족도 못 알아볼 정도로 기억력 장애를 보이다가 가끔 ‘제정신’으로 돌아와 원래대로 기억하는 증상은 엔그램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를 인출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되겠다. 최근 MIT의 도네가와 박사 연구팀은 역행성 기억상실이 일어난 생쥐나 치매 모델 생쥐에게 광유전학 기법을 통해 학습 기간이 활성화된 기록이 있는 신경세포들을 인공적으로 재활성화시켰더니 다시 기억이 인출될 수 있음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억의 인출 과정이 저장 과정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기억 인출 과정에서 재활성화된 신경회로망 또는 시냅스는 다른 자극에 의해 변성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즉 단단한 기억이 틈을 보이는 것이다. 생쥐에게 전기충격과 소리를 함께 들려줘서 소리에 대한 공포기억을 심어준 다음날, 소리만 들려줘서 전기충격에 대한 공포기억을 되살리게 되면 처음에는 그 소리를 듣고 저장되어 있던 공포기억을 인출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소리만 반복해서 들려주게 되면 더 이상 소리가 전기충격과 연관되어 있지 않음을 학습하게 되어 반응하지 않게 된다. 인출 과정을 겪은 공포기억이 새로운 정보로 인해 변형되는 것이다. 인출 과정에서 ‘연결이 끊어졌다’라는 정보가 연약한 기억에 가해지면서 원래의 공포기억은 새로운 형태의 기억이 된다.

또 다른 예를 보자. 굶주린 동물에게 두 개의 레버를 순서(순서1)대로 누르게 한 뒤 먹이를 주면, 동물은 금세 그 순서를 익혀서 먹이를 먹는다. 즉 ‘먹이=순서1’의 기억이 만들어진다. 이때 먹이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면 그 순서는 여러 번 반복되다 점차 줄어들고 동물은 새로운 패턴의 순서로 레버를 누르게 된다. 만약 반대 순서(순서2)로 눌렀더니 먹이가 나오게 되면 동물은 ‘먹이=순서2’의 기억을 형성하면서 원래 기억을 변형시킨다. 이러한 과정은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학습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기억의 재조작은 새로운 학습 과정을 통해 원래의 기억을 변형한 뒤 새롭게 저장하게 되는 과정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통해 동물은 뇌용량 및 외부 정보의 한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더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또 머릿속에서 자유자재로 정보를 인출하고 서로 덧대어 변형시키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면서, 주어진 정보 이외의 것들을 창출하는 능력을 발전시켰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그 능력이 더욱 발달한 나머지 사진기억 능력을 크게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을 수도 있다.

기억 변형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기억이 인출되고 재저장되는 과정에서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를 응용해서 인위적으로 기억을 조작할 수도 있다. 이때 새로운 기억이 원래의 기억이라 생각하게 하려면, (1)원래의 기억이 인출되는 통로를 파악하고 (2)파악된 통로가 활성화될 때를 노리거나 인위적으로 활성화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정보를 가미하는 것이다.

적어도 기억의 인출통로를 파악하여 이를 활용한 ‘가짜 기억 심어주기’는 동물을 대상으로 성공한 바 있다. 위에 언급된 도네가와 연구그룹은 생쥐를 특정 공간에서 전기 충격을 가하여 그 공간에 대한 공포 기억을 만들었다. 이때 광유전학 기법을 통해 전기충격을 받은 특정 공간 ‘A’를 기억하는 해마 신경세포를 파악하여 그 생쥐가 다른 공간 ‘B’에 노출되었을 때 인공적으로 자극했더니, B 공간을 전기충격을 받은 곳으로 기억하고 공포기억을 인출하게 된 것이다. 이 연구가 이미 저장된 기억을 변형시켜서 왜곡된 기억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억의 저장 장소를 파악하여 인공적으로 인출하는 기술을 확립했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인공적 인출 과정과 의도된 정보에 해당하는 신경활성도를 결합해 인공적인 기억 주입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이 원리를 응용해 기억을 변형하는 상황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참전군인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으면 중립적인 물건이나 공간, 상황 등에 과도한 신체적·감정적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때 일부러 기억과 관련된 정보를 과노출시켜 예전 기억을 인출하는 동시에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하도록 반복 학습을 시키기도 한다.

개인적인 기억 변형 프로젝트로, 아내의 출산 당시 기억을 남편의 헌신도 조금 포함하도록 변형하는 작업을 고심 중이다. 출산 전날 기억을 아내와 나누면서(의도적 인출) 동시에 그 당시 나의 헌신성을 증명하는 사례(새로운 정보 1) 및 내가 노트북을 통해 본 것은 게임채널 동영상이었다는 주장(새로운 정보 2)을 보충하는 것이다. 그런데 매번 연구원들과 미팅 날짜 관련 이야기를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자꾸 내가 토요일이 아닌 목요일에 미팅을 하자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필자 박형주

[전문가의 세계-뇌의 비밀] (15) 나는 네가 한 일을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서울대 생명과학부 졸업 후 동 대학 대학원에서 바다달팽이를 이용한 학습과 기억 메커니즘 연구로 신경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및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캠퍼스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생쥐를 이용하여 교세포 및 신경영양인자에 의해 조절되는 장기시냅스 가소성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현재 한국뇌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분자신경생물학 연구실원들과 함께 학습과 기억을 조절하는 시냅스 가소성의 자세한 메커니즘을 분자생물학, 전기생리학, 행동생물학 기법 등을 종합 활용하여 연구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기억의 정체를 설명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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